일본(日本)이 또 이 난 때 청(淸)군이 한양[京城]에 거류한 일본 인민과 부녀를 해쳤다 하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하여금 천진(天津)에 가서 담판하게 하였다. 마침내 청⋅일 양국이 한양의 주둔군을 철수하고 장래 조선(朝鮮)에 일이 있어 양국 중에 한 나라가 출병하게 되면 피차 문서로 알리기로 하였다. 이것이 곧 천진 조약이다. 고종(高宗) 22년(1885) 을유(乙酉), 지금으로부터 21년 전1)원문에는 22년 전으로 되어 있으나, 21년 전으로 바로잡는다.이다.
이후부터 청나라는 군대를 철수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조선 통상사무 전권위원(朝鮮通商事務全權委員)이 되어 한양에 머물며 은밀히 내치와 외교를 간섭하기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또 당시는 두 차례의 내란 뒤인 데다 흉년과 전염병이 잇따라 도적이 대낮에 횡행하고 난민이 사방에서 봉기하였다. 정권은 다시 외척에게 돌아가 서로 권세를 다투고 사리를 꾀하여 나라의 위세가 더욱 부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