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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패

호패(號牌)는 조선 시대에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닌 나무로 만든 패로 지금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이며, 신분에 따라서 재료와 기재 내용이 구분되었다.

호패법의 시행 목적은 호구(戶口)를 명백히 하여 민정(民丁)의 수를 파악하고, 직업과 계급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군역(軍役)요역(徭役)의 기준을 밝혀 백성의 유동과 호적 편성상의 누락⋅허위를 방지하는 데 있었다.

호패법은 원(元)나라에서 시작되었는데, 고려에서도 1354년(공민왕 3년)에 이 제도를 실시하고자 했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1398년(태조 7년) 이래 계속하여 호패법 실시와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지다가, 1413년(태종 13년) 호패사목(號牌事目)을 작성하여 실시하면서 전국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호패법은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 대까지 5차례나 중단 되었는데 그 이유는 호패를 통한 이득보다는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피해가 더 컸으므로, 백성들이 호패 받기를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호패를 받은 백성은 호적과 군적(軍籍)에 올라가게 되면서, 동시에 군정(軍丁)으로 뽑히거나 그 밖에 국역(國役)을 져야만 했던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여러 조치들을 취하였는데, 그 중 강경책으로는 호패 위조자는 극형에 처하고, 호패를 차지 않은 자는 엄벌에 처하는 등의 법을 마련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대에는 호패청(號牌廳)을 두고 사무를 전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숙종 대에는 호패 대신 종이로 만든 지패(紙牌)를 통용하게 하여 간직하기는 쉬우나 위조는 어려운 방법을 취하기도 하는 등 호패법의 원활한 실시를 위하여 여러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패법은 사회적 물의만을 일으킬 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1∼2할에 불과하였고, 『성종실록(成宗實錄)』은 호패를 받은 자 중 실제로 국역을 담당할 양민[良人]은 1∼2할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호패법은 조선의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과 국역 등을 통한 국가 운영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필요하였지만, 실제로는 양인들의 부담만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 실시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던 제도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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