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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원효대사(元曉大師) 영정은 이종상(李鍾祥)이 그린 원효(元曉, 617~686)의 국가표준영정이다. 1978년에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가로 84㎝, 세로 117㎝이며,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효는 성은 설씨(薛氏)이고 법명(法名)은 원효, 아명(兒名)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다. 경상북도 압량(押梁)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가 되던 해에 자신이 살던 집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하고 스스로 이름을 ‘이른 새벽’을 뜻하는 원효로 바꿨다. 648년(진덕여왕 2년) 그는 황룡사(皇龍寺)에서 각종 불전(佛典)을 섭렵하여 불교공부에 정진하였다. 이후 34세에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으나, 고구려 국경에서 체포되어 귀국한다. 661년(문무왕 1년) 그의 45세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떠나 당주성 부근에 도착하였으나, 여행 도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터득하고 분황사(芬皇寺)로 돌아왔다.

이후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재위 654~661)의 둘째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으며, 이 일로 그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俗人) 행세를 하였다. 또한 어느 날 한 광대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구경하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라는 『화엄경(華嚴經)』에 담긴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무애가(無㝵歌)라는 이름을 붙여 세상에 유포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게 되었다.

그는 왕과 고승들 앞에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강론하였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긴 시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고려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효의 사상은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무애사상(無㝵思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일심사상은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 나타나며, 귀일심원(歸一心源), 즉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의 진리에 있다는 뜻으로 이를 궁극의 목표로 생각하였다. 화쟁사상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 나타나는 것으로, 두 가지 이상의 다른 견해를 화해시키고 조화롭게 융합시키는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무애사상은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말처럼, 부처와 중생이 차별 없이 바다와 같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무애사상은 일반민들에게 불교를 알리는 계기가 되어 원효의 불교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원효가 저술한 책은 현존하는 20부 22권을 포함하면 110여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龍樹)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책으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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