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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진주성(晋州城)은 경상남도 진주시(晋州市)에 있는 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군관민들의 항쟁으로 왜군을 막아낸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는 2차례에 걸친 전투가 있었다. 먼저 1차는 1592년(선조 25년) 10월에 벌어졌는데,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 대첩을 이룩하였다. 당시 진주는 경상도에서 유일하게 왜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었고, 또한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이곳을 잃으면 군량을 보급하는 전라도 지방을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대로 전라도로 진격하기 위하여 왜군에서도 진주성이 필요하였으므로,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는 왜군 3만여 명을 이끌고 이곳을 포위⋅공격하였다. 6일간에 걸친 전투 끝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퇴할 수 있었으나, 전투를 이끈 김시민은 왜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 승리는 진주성 군관민들이 사력을 다한 끝에 얻어 낸 것이었으며, 아울러 남강(南江)에 쌓은 성벽에 힘입은 바가 컸는데, 성벽에 오르기 위해서는 물을 건너야만 했던 것이다.

이후 1593년(선조 26년) 4월 서울에서 철수한 왜군은 강화 회담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1차 진주성 전투의 패전을 설욕하고 전라도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진주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왜군은 이 전투에 신무기를 총동원하였으며 왜군의 선봉만도 5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서 싸운 조선군은 황진(黃進, 1550~1593)⋅최경회(崔慶會, 1532~1593) 휘하의 관군과 김천일(金千鎰⋅1537∼1593)이 지휘하는 의병을 합하여 3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6월 19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10일간 치열하게 계속되었으나, 29일 진주성은 결국 왜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투 중 황진은 적군의 총탄에 맞아 죽었으며, 김천일은 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에 남아 있던 6만여 명의 군민들도 대부분 왜병에게 학살되었다. 그러나 왜군도 이 싸움에서 커다란 타격을 입고 동남해안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한편 이 전투와 관련해서는 승전을 기념하여 연회를 벌이던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는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이야기가 전하며, 이때 남강에 몸을 던졌다는 의암(義巖)이 남아 있다.

진주성은 시대별로 이름이 바뀌어서, 삼국시대에는 거열성(居烈城), 통일 신라 시대에는 만흥산성(萬興山城), 고려시대에는 촉석성(矗石城), 조선 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 불렸다.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으며, 내성의 둘레는 1.7㎞, 외성의 둘레는 4㎞이다. 특히 외성은 임진왜란은 발발하였으나, 아직 진주성 전투는 발발하지 않았던 1591년(선조 24년) 7월, 경상 감사 김수(金晬, 1547~1615)가 진주성을 수축하면서 쌓았다.

한편 1604년(선조 37년)에 합포(合浦)에 있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후에, 내내 진주성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부터는 진주 관찰부, 1896년(건양 원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 관찰사감영이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가 진영못을 매축하는 과정에서 진주성의 외성 전체와 내성 일부를 헐어 버렸다. 그리하여 광복 후 1969년부터 촉석문(矗石門) 중건과 함께 본격적으로 진주성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성내(城內)의 민가 철거와 성 외각 정비 사업, 그리고 공북문(拱北門) 준공 등의 사업을 2000년대까지 점진적으로 실시하였다. 현재 성내(城內)에는 촉석루(矗石樓)⋅창열사(彰烈祠)⋅의기사(義妓祠)⋅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 임진대첩계사순의단(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檀)⋅촉석문⋅공북문⋅호국사(護國寺) 등이 있다.

1963년 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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