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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한양을 지키던 산성으로 도성(都城)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둘레는 약 8,000m ,지정면적은 52만 8460㎡에 이른다. 백제의 온조왕(溫祚王代, ?~27, 기원전 18~기원후27)의 성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가 피신했던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던 1624년(인조 2년)으로,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 1580~1637)를 시켜 남한산성을 축성(築城)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2년 뒤에 남한산성은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개, 암문(暗門)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를 갖추게 되었으며, 광주읍의 치소(治所)도 산성 내로 옮겼다. 또한 유사시에 임금이 거처할 수 있도록 하는 축성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궁(行宮) 73칸 반과 하궐(下闕) 154칸을 짓기도 하였다. 이 공사를 위하여 승려인 각성(覺性, 1575~1660)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도록 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장경사만 남아 있다. 이어 궁실에 따른 건물로는 1688년(숙종 14년)에 좌덕당(左德堂)을 세우고, 1711년(숙종 37년)에는 종묘(宗廟)를 봉안하기 위하여 좌전(左殿)을 세웠다. 그리고 1798년(정조 22년)에는 한남루(漢南樓)를 세우는 등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 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시설을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을 잘 완비한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는 총융청(摠戎廳)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따로 수어청(守禦廳)을 설치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 수어청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中營將)은 북장대(北將臺), 후영장(後營將)은 동장대(東將臺), 우영장(右營將)은 서장대(西將臺)에 각각 진을 치게 되었고, 좌영장(左營將)은 동장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은 4장대 가운데 서장대만이 남아 있다.

한편 남한산성은 병조호란과 깊은 관계가 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이곳으로 피란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전쟁의 상황이 불리해짐에 따라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을 비롯한 주화파(主和派)는 청(淸)나라와의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 결국 인조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기로 하고,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한강가의 삼전도(三田渡)에 수항단(受降壇)을 마련한 후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며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였는데, 이러면서 남한산성은 전쟁의 패배라는 아픈 역사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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