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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루

청원루(淸遠樓)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의 화의(和議)에 반대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기존의 건물을 중건한 것으로, 청(淸)나라를 멀리한다고 청원루라는 이름을 지었다.

평양 서윤(庶尹)을 지낸 김번(金璠, 1479∼1544)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 때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경상도 안동에 집을 지었는데, 100여 년이 지난 후에 김상헌이 이 집을 중건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청원루이다.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로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6년간 인질로 끌려갔던 김상헌은 1645년(인조 23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안동으로 내려와서 은거를 시작하였는데, 그러면서 기존 건물을 누각식으로 중건하였다. 그리고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이것은 김상헌의 척화(斥和)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두 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한 채가 허물어져 현재 청원루만 남아 있다.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이며, ‘ㄷ’자 구조이고, 정침(正寢)은 기단을 매우 높게 쌓은 후 앉혔으며, 정침 좌⋅우 익사(翼舍)누마루처럼 꾸몄다. 정침 대청은 앞쪽에 2척 정도의 폭으로 한 단 낮게 마루를 깔아 2단으로 구성하였다. 정침 전면 원주 상부는 길고 날카로운 살미를 끼워 주두(柱頭)를 얹고 내측으로 보아지를 두어 대량(大樑)을 받게 하였고, 도리 방향으로는 창방 없이 공아(栱牙)를 짜서 장여[長舌]와 처마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양 익사는 통주로 정침과 달리 창방을 보내고 살미와 보아지를 끼웠다. 이 건물은 평면구성과 구조 양식 특히 창방을 생략한 수법 등에서 독특한 모습이 보인다.

198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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