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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활동

사진은 반민족 행위 처벌 특별법이 시행된 직후의 모습이다. 첫 번째 사진은 반민족 행위자 투서함에 친일 행위 관련 내용을 투서하는 시민의 모습이고, 두 번째 사진은 반민족 행위 처벌을 위한 재판 장면이다. 세 번째 사진은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 따라 체포되어 이송되는 김연수(金秊洙, 1896~1979)와 최린(崔麟, 1878~1958)의 모습이다.

친일파 처벌 문제는 건국 운동의 일환으로 8⋅15 광복 직후부터 범 사회적으로 제기되었으나 정부 수립 시기까지 지연되었다. 당시 좌익은 친일파의 처벌에 적극적이었으며, 우익은 국가 수립 이후에 하자는 입장이었다. 보류된 친일파 처벌 문제는 정부 수립 이후 제헌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반민족 행위 처벌 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다. 이 법안에 근거하여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49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조사 위원회는 682건의 조사를 진행하였고, 221명의 친일파들을 기소하였다. 하지만 반공을 우선시 하고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부는 위원회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6월 6일 경찰을 동원하여 위원회를 습격하여 조사 위원회 산하 특경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또한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국회의원들을 간첩 혐의로 구속하였다. 이런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특별법의 시효를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31일로 단축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이에 따라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위원회의 활동으로 실형이 선고된 인원은 12명이었다. 여기에는 김연수, 최린, 박흥식(朴興植, 1903~1994),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최남선(崔南善, 1890~1957)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실형을 선고 받은 반민족 행위자들은 1950년 3월까지 형 집행 정지로 모두 석방되었다.

세 번째 사진의 가운데가 김연수이고, 오른쪽이 최린이다. 김연수는 경성 방직 사장으로 일제 강점기 친일 기업인으로 활동하였고, 1935년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만주국 명예 총영사, 조선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수감되었던 김연수는 곧 풀려났으며, 그 뒤 재계 원로로 활동하다 1979년 사망하였다.

최린은 일제 강점기 천도교 신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자치운동의 혐의를 받았고, 1930년대 들어 조선 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면서 변절하였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이사, 조선 임전 보국단 단장, 조선 언론보국회 회장 등 각종 친일단체의 주요 직위를 역임하였다. 최린은 재판정에서 친일 행위를 시인하고 참회하여 실형이 선고되었으나 곧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뒤 6⋅25 전쟁 기간 중에 납북되어 1958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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