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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 선거

첫 번째 사진은 1960년 3월 15일에 진행된 정⋅부통령 선거 당시 5인조로 짝을 지어 투표소로 향하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두 번째 사진은 정⋅부통령 선거 후보들의 포스터를 촬영한 것이다. 가장 왼쪽부터 통일당의 부통령 후보 김준연(金俊淵, 1895∼1971), 가운데는 여당인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부통령 후보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의 포스터이다. 오른쪽은 제1여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 1894~1960)과 부통령 후보 장면(張勉, 1899~1966)의 포스터인데, 조병옥은 신병으로 미국 육군 병원에서 수술 도중 1960년 2월 10일 사망하였기 때문에 포스터 하단에 조병옥의 사진은 삭제되어 있다.

비민주적이고 파행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던 이승만 정부는 점차 대내외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58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유상 차관 형식으로 전환되자, 경제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는 사회⋅경제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고, 독재정치로 인한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미국과의 협력 관계에도 균열이 생겼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의 부패가 미국의 원조를 좀먹고 있으며, 이승만의 고집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뜻을 내비쳤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 보안법 개정, 경향신문 폐간 등 정권 비판 탄압에만 급급하는 동안 정권 유지 능력을 빠르게 상실해갔다.

이런 가운데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같은 해 2월 10일 유력한 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미국에서 사망하게 되자 이승만이 대통령 후보로 단독 입후보 하게 되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당시 이승만은 86세의 고령이었으므로 당선 후 임기를 제대로 수행할 지 확실하지 않았다. 대통령 유고시에는 부통령이 그 직위를 물려받게 되므로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 선거를 획책하였다.

자유당은 학생들이 야당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강제 등교를 시키고, 사전 투표 및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를 실시하는 등 온갖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 선거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이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러한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장기 독재를 노린 3⋅15 부정 선거는 이렇게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불신을 가속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마산에서 발견되자 4⋅19 혁명이 촉발되었고, 결국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는 몰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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