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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 다채로운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이것!
달콤하고 부드러운 고구마로 만든 간식인데요. 고구마는 요즘, 간식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과거에는 굶주림을 이겨내게 해 주었던 고마운 작물이었다고 합니다.
흉년에 굶주림을 이겨내기 위해 이러한 구황작물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던 선조들!
어떤 작물을 찾고 재배하며 확산해 나갔을까요?

선조들이 솔잎을 먹었던 이유는?

도울 구, 흉년들 황!
구황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흉년이 들었을 때 쌀 등을 대신해 먹을 수 있는 것을 얻거나 기근이 심할 때 굶주림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구황’이라고 하는데요. 먹을거리가 부족해 고통 받았던 선조들의 일화를 역사 자료에서 살펴볼까요?

개경에 큰 기근이 들자, 남쪽 지방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관리와 백성이 길에 잇달았다. 중방과 어사대가 관리들이 관문을 나가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관리 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 『고려사』 「세가」 원종 즉위년(1259) 11월

고려 원종 때는 기근이 들자 다른 고을로 음식을 얻으러 나선 백성과 관리들이 굶어 죽는 일이 많았고 조선 시대에는 기근이 들면 살던 지역을 떠났다가 역병에 걸려 객사하는 유랑민도 많았습니다.

아침부터 눈이 대리더니 정오에 크기가 팥만한 우박이 내리고 오후에 눈과 비가 섞여 내렸다.

- 『승정원일기』 현종 11년(1670) 윤2월 26일

현종 때는 기상 이변으로 흉년이 들어, 수많은 사람이 역병과 기아로 목숨을 잃었던 경신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전근대 사회에서는 기근이 심하면 부자라도 먹을거리를 구하기 힘들 수 있었는데요. 이유가 뭘까요?

농업이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자연재해에 대비할 만큼 생산량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험에 대비해 선조들은 자연 속에서 구황에 사용할 수 있는 식품을 계속해서 찾았고 보다 안정적으로 식량을 얻고자 구황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구황작물은 주곡 농사보다 재배 기간이 비교적 짧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재배가 쉬워, 주곡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남지역의 백성이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목화씨까지 먹었는데 먹은 자는 모두 죽었다.

- 『명종실록』 명종 9년(1554) 2월 9일

또한 나라에서는 흉년에 대비한 책을 편찬하기도 했는데요. 명종 때는, 기근이 심해 먹을 수 없는 것도 먹고 죽는 사람까지 생기자 흉년 대비 지침서 『구황촬요』를 편찬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선조들이 먹었던 다양한 구황식품 가운데 『구황촬요』에 소개된 대표적인 구황식품은 무엇일까요?

흉년에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를 으뜸으로 꼽고 있는데요. 솔잎 가루를 다른 식량과 섞거나 죽으로 섭취하도록 해 솔잎만으로는 부족한 영양을 보충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달 초4일부터 초8일에 이르기까지 서리가 내렸는데, 이날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화곡(벼에 속하는 곡식)이 말라 죽으니, 모두 논을 갈아엎어 메밀을 심었다.

- 『태종실록』 태종 14년(1414) 5월 14일

한편, 『태종실록』에는 구황작물로 메밀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주곡 농사가 잘 이뤄지지 않을 때 긴급하게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메밀은 식품으로서의 한계도 있었는데요. 점성이 부족해 다른 곡식과 섞어 국수로 먹거나, 다른 곡식이 없으면 묵으로 먹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구황식품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조리법도 발달했는데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쌀이나 곡류가 많이 부족했던 시대니까 곡류는 조금 넣으면서 구황작물을 넣어서 양을 많게 한 것이죠. (메밀로) 죽을 쑤어 먹는다든지 올창묵(올챙이묵)을 쑤어 먹는다든지 국수를 해 먹는다든지 좀 특별하게, 좀 맛있게 하면서 양을 많이 늘려서 먹는 일들이 있었어요.”

윤숙자 대표 / 한국전통음식연구소

부족했던 농업 생산량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재배된 구황작물! 적은 양으로도 영양을 보충하고, 굶주림을 이겨낼 수 있는 효율적인 조리법과 함께 발전해 나갔습니다.

구황작물 확산, 국가와 지식인이 앞장서다

각 고을에서는 백성들을 시켜 해마다 흉년 구제의 물자를 준비하게 한다.

- 『경국대전』

농본사회 조선은 기본 법전 『경국대전』에서 보듯이 구황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비축한 곡식을 빌려주거나 무상으로 배급하기도 했는데요. 구황작물도 배급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라에서 구황작물을 어떻게 확산했는지 메밀을 통해 알아볼까요?

충청도의 메밀씨 3천 석을 풍해도(황해도)로 배로 실어 나르게 하였다. 풍해도 백성들이 가뭄으로 인하여 농사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종자를 주어서 경작케 하기 위함이었다.

- 『태종실록』 태종 5년(1405) 5월 24일

『태종실록』에 따르면 가뭄으로 농사 시기를 놓쳤을 때 메밀 종자를 여러 지역으로 운송했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은 빠르게 자라는 메밀을 전국적으로 재배하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메밀을 널리 배포할 수 있었을까요?

각도에 공문을 내어 메밀을 경작하게 하되 ... 시기에 따라 경작할 것을 권하고 격려하라.

-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6월 1일

조선 시대에는 조운 정책이 제도화 되었는데요. 나라 곳곳에는 조세를 보관했던 창고, 조창들이 설치돼 있었고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조운선에 실어 조운로를 통해 수도인 한성의 창고로 옮겼습니다.

메밀 종자를 산간 고을로부터 연안의 군읍으로 이송하는 데는 동풍만 순조로이 불어주면 (조운선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다리가 달리지 않았어도 절로 이송될 것이다.

- 『정조실록』 정조 22년(1798) 6월 5일

기근이 들면 쌀과 콩 등의 곡물은 물론 구황작물 메밀도 조운선에 실어 피해 지역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운송망이 더욱 확장되었고 곡물이 비축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보내기도 했는데요.

일례로 18세기, 강원도와 경상도에 기근이 들 때 함경도에 있던 환곡 창고인 교제창의 곡식으로 원조했고, 함경도에 기근이 심하면 경상도의 포항창에서 원조를 했습니다.
한편, 메밀 확산에 국가가 나섰다면, 지식인들이 재배와 확산에 앞장섰던 것이 있었으니, 고구마인데요.

고구마는 맛이 달고 성질이 평하다. 효력은 산약(마)과 같으며 해중인(도서지방 사람)은 오곡을 먹지 않고, 다만 이것만을 먹고도 오래 사는 이가 많았다.

- 『본초강목』

고구마에 대한 정보가 없던 시절, 지식인들은 외국의 의서와 농서를 통해 구황작물로서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와 지식인들이 접한 뒤 조선 사회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도입 초기에는 재배 실패가 이어졌지만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고구마를 연구하며 생산량 증가에 이바지했고 국가가 협조해 전국으로 확산할 수 있었는데요. 백성들을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국가와 지식인의 노력이 구황작물의 역사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전근대 시기 기근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구황이라고 한다.
2. 구황식품으로는 소나무, 메밀, 고구마 등이 사용됐다.
3. 흉년에 대비해 구황작물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으로 조선 명종 때 쓰인 구황촬요가 있다.

해설

1. 구황 및 구황작물의 개념

1) 구황과 구황작물이란 무엇인가?

구황은 흉년 및 기근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총체이다. 식량을 확보하려는 개인의 노력, 사회적 협동과 부조, 제도적 조치와 국가적 정책 등을 포괄하며, 이들은 서로 연관관계를 맺는다. 실제 구황에서 중시되는 것은 재난을 당한 작물(쌀, 밀, 보리 등)을 보충-대체할 수 있는 구황식품으로 이는 섭취할 수 있는 모든 식품을 총칭한다. 구황작물은 구황식품에 포함되면서도 확보, 경작 등이 용이하여 인위적 조치를 통해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다. 즉 구황작물은 구황식품의 개념 속에 포함된다.

2) 구황식품과 구황작물은 왜 필요했는가?

전근대 농업사회는 농업생산력이 불안정하고, 교역체계도 미약하였다. 따라서 다수의 백성은 기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구황식품/작물의 확보와 인지 자체가 중시되었으며 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공유할 필요성이 상당하였다.

특히 흉년 등을 맞이하면 섭취불가물을 먹고 죽거나 제대로 된 섭취 등을 하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따라서 구황식품의 정리와 정보제공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 명종 9년(1554)에는『구황촬요(救荒撮要)』가 편찬되었다. 구황식품/작물, 치료조치 등을 정리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한글언해를 첨부하고, 목판으로 인쇄해 유포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의 노력은 지식인들에게도 이어져, 17~18세기 이후에 편찬되는 사찬의 농서, 살림서 등에서도 구황의 내용을 취급하는 것으로 계승되었다.

2. 대표적 구황식품과 양상

구황식품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여러 요인으로 인해 선호되는 구황작물의 종류는 제한되는 편이며, 특히 신대륙의 고구마, 감자, 옥수수가 도입되기 전에는 더욱 심각하였다. 이에 주요 구황서, 농서 및 정책적으로 권장되는 구황식품은 주변에서 구하기 용이한 소나무와 실농(失農)을 보충할 수 있는 메밀이었다.

1) 한반도의 상시적 구황식품 소나무(솔잎)

소나무는 한반도 각지의 산악에 다량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로 먹을 수는 없기에 소나무(특히 솔잎) 섭취방법이 구황방(救荒方) 등을 통해 배포되었으며, 지식계층도 식용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소나무는 다른 식량과의 혼합을 통해서 섭취가 가능하며 그 자체만으로는 영양보충 등이 어려웠기에 온전한 구황식품이 될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하였다.

2) 조선시대의 대표 긴급 구황작물 메밀

메밀의 생육기간은 60~80일로 빠른 성장이 주요 특징이며, 한랭-건조기후와 산성토양에서도 쉽게 성장한다. 따라서 재난으로 인한 실농 위기에 긴급대체작물로서 유용하였으며, 이는 조선시대에 구황작물로서 중시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산악지대에 비해서 논농사 지역에서는 메밀의 재배 및 비축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는 지역편차를 극복하여 메밀 종자를 운송-교환하는 체제를 운영해야 했다.

3. 농본(農本)국가 조선, 구황을 중시하다

조선은 유교적 농본이념에 입각해 구휼제도를 시행하였으나, 불안정한 생산은 주곡의 확보조차 어려운 상황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구황서의 편찬과 구황식품/작물 도입과 같은 간접적 구황조치뿐만 아니라, 정책적인 직접조치로써 구황을 실천하고자 한 조정의 노력은 도토리, 황각 등 구황식품을 상시 비축하도록 하는 조치와, 메밀 등 구황작물을 재난지역으로 운송하는 조치로 나누어 시행되었다.

1) 구황식품, 구황작물의 비축을 위한 노력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비황(備荒)조에서는 주곡뿐만 아니라 흉년대비 구황식품의 확보가 명시되었다. 주요 대상은 장기보관이 용이한 도토리, 바닷가에서 구하기 쉬운 황각(黃角) 등이었다. 조정은 수군에게 황각 채취를 정례화하면서, 전국적으로 도토리숲의 조사와 조성에 힘쓰고 비축량을 정하였다. 이처럼 조정이 구황식품의 비축에 힘씀으로써, 민간에서도 구황식품/작물의 비축 및 개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2) 구황작물의 재생산, 확산을 위한 운송-교환체제

전근대사회의 각 지역은 각자의 농사여건에 차이가 있었기에, 구황작물의 재배 및 비축량은 편차가 있었다. 시장도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국가가 주곡 및 구황작물의 비축-운송에 나섰다. 운송에서는 전국적 망인 조운제도를, 역내 배분에서는 환곡제도를 운영하고 있었고, 18세기에는 구황을 목적으로 하는 교제창(交濟倉)-포항창(浦項倉), 제민창(濟民倉) 등의 비축-운송-교환체제를 운영하였다.

이는 주곡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였지만 구황작물의 수요와 배포에도 적용되었다. 조선은 국초부터 기근 시에 메밀 등을 전국적으로 운송하였는데, 교제창-포항창 등은 메밀을 포함한 잡곡의 비중이 높았다. 이처럼 전국적인 시스템은 조세의 상납뿐만 아니라, 구휼을 위한 주곡 및 구황작물의 이송과 교환 등에 적용되었다.

4. 조선 후기의 대표 구황작물 : 고구마

1) 외국으로부터 선행 지식의 수용과 도입노력

조선 초기부터 외국의 구황식품, 구황서를 주목하고 도입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병행되었다. 이는 지식인이 외국의 농업기술과 구황작물을 도입하려는 풍토를 조성하였다. 18세기에는『본초강목(本草綱目)』등 중국농서를 통해 일찍부터 고구마의 존재가 동아시아 사회에 알려졌다. 이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고구마를 우연히 도입한 것이 아니라, 관련지식을 선행적으로 인지-수용하였다. 이는 이광려 등이 조엄 이전부터 고구마를 인지하고 종자의 수배에 힘썼던 것에서도 나타난다.

조엄은 영조 39년(1763)에 통신사 정사로 임명되어 쓰시마를 경유하게 되었고, 책에서 알게 된 고구마를 접하자 종자를 동래부에 배송하는 한편 재배법에 대해서도 탐문하였다. 국내에 고구마가 도입되자 이광려, 강필리, 성해응, 서영보 등 여러 지식인의 네트워크가 결합하면서, 고구마는 점차 조선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2) 지식인 계층의 고구마 재배법 연구와 개선

지식인의 노력은 기술개선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기초기술부터 세심한 관리를 필요로 하였기에, 시험재배 등을 통해 새 방법을 개발하거나 외국농법 중에서도 적합한 것을 재분류하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또한 기술의 확산을 위한 서적의 간행과 배포, 이해를 위한 한글 언해화도 진행하였다. 이는 지역적 차이와 신분적 차이를 넘어서는 탐구와 교류였는데, 구황을 통한 경세제민이라는 유교적 관심사가 유교적 지식인의 네트워크를 통해 계층적, 지역적 차이를 넘어 계승-확장된 것임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서경창의 『종저방(種藷方)』에 대한 비변사의 출판지원과 같이 농본과 구황을 중시하는 국가 역시 지식인의 노력을 지원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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