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특수훈련반(미 OSS)의 훈련을 마치고 공작임무를 수행하러 적 후방을 향하여 떠나던날 대장 이범석장군을 모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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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사회상 사진아카이브

1920년대 사회상 - 산업: 개발과 수탈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은 산업, 특히 농업분야에서 '개발'이 이루어지고 주요 항구들이 증축, 개수축되는 등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었다. 그 결과는 조선에서의 농업 생산량과 무역량의 증대라는 '경제성장'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이 식민지 하의 한국인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산미증식계획에서 증산에 필요한 비용은 대개 소작인이었던 농민들이 부담해야 했고, 생산된 미곡은 지주와 정미업자를 통해 상품으로서 일본에 이출되었다. 한국인들은 생산한 쌀을 일본에 이출하고, 만주산 좁쌀을 식량으로 충당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무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항구의 설비를 확충하고, 일본 본토에 조선의 특산품을 선전하기 위해 각종 박람회를 개최하였다. 1920년대의 경제성장은 조선의 산업구조를 일본의 요구에 맞추어 농업, 특히 미곡 단작 형태로 재편하고 일본의 세력권 안에서의 무역을 증대시키는 것, 즉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심화하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산미증식계획

조선총독부는 1920년부터 경지 정리, 수리시설 확충 등을 통해 미곡의 생산량을 증대시키려는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는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어 내적 조건이 완료된 상황에서,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드려는 것이었다. 1910년대 말 일본에서 중화학공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쌀 생산이 정체되고 1918년 '쌀 소동'이 발생하는 지경에 이르자, 일본 정부는 식민지, 특히 조선에서의 미곡 증산을 통해 국내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한반도 최고의 곡창지대인 전북 호남평야에서도 다양한 수리시설들이 축조되었다. 특히 익옥수리조합은 거대한 대아 저수지를 축조하였고, 그 준공식에는 총독부 당국자들도 참여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사진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옥구 군수 김정기(金正基)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가 준 쌀을 도쿄(東京)에 가져가 시식했더니 평가가 좋았다는 내용이다. 일본으로 이출해야 할 이 지역 쌀의 상품가치에 대해 조선총독부 당국자도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하겠다.

대아 저수지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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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옥수리조합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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