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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세종이 천문학을 발전시킨 이유는?

5세기 조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첨단의 관측의기를 갖춘 천문기상대를 소유했다.

- 조지프 니덤(케임브리지대학 교수, 동양과학 역사학자)

조선을 15세기 세계 수준의 과학국가로 만든 인물은 바로 조선의 4대 왕, 세종입니다.

세종은 천문의기 창제사업을 시작했는데요. 경북궁에 천문관측기구를 설치해 천문학 완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세종의 명을 받은 과학자들은 중국의 천문 관측과 기구의 원리를 파악한 후 조선의 하늘과 지리적 환경을 고려해 조선만의 새로운 관측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시계, 앙부일구가 대표적입니다. 앙부일구는 모양이 하늘을 우러르는 가마솥 같은 해시계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요. 기존 평평한 해시계와 달리 왜 오목하게 제작했을까요?

평평한 해시계는 해의 그림자 길이가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측정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앙부일구는 시반면을 오목하게 만들어 쉽고 정확하게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앙부일구는 뾰족한 막대기인 영침과 오목한 반원형의 시반면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영침의 해 그림자가 가리키는 시각선과 절기선을 읽으면 현재 시각과 24절기를 모두 알 수 있는 획기적인 시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세종은 더 나아가 낮뿐만 아니라 밤이 되거나 비나 눈이 올 때도 시간 을 알 수 있는 자동 물시계를 원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자 장영실은 ‘자격루’를 개발해 세종의 바람을 실천했습니다.

물시계는 흐르는 물의 양과 시간의 흐름을 맞춰 눈금을 가리키는방식인데요. 자격루는 시간마다 구리구슬을 굴러 떨어지게 해 지렛대장치로 인형이 북과 징을 치고 시간을 알리게 했습니다. 15세기 최고의 기술력이 접목된 첨단 발명품인 것입니다.

세종은 왜 정확한 시간을 알려고 했을까요? 나라를 혼란 없이 잘 통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를 들어 궁궐에서 호위병들이 업무교대를 하거나 백성들이 통행하는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일정하게 지키는 데 필요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바로 농사 때문인데요. 나라에서 백성들이 제 때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날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아울러 국방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세종이 시계를 만들어 가장 먼저 보낸 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국경 변방이었습니다.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물시계와 천체시계를 합친 자동물시계, 옥루를 설치했습니다. 흠경각 중앙에는 종이산을 만들고 그 사방에 사계절의 풍경과 농사짓는 풍경을 그려 넣었는데요. 세종은 수시로 이곳을 찾아 궁궐 밖 백성들의 삶과 농사의 어려움을 되새기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세종실록』 원문
‘農者, 天下國家之大本也, 自古聖王, 莫不以是爲務焉’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다.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이를 힘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세종실록』 세종 11년(1429) 5월 16일

세종은 국가 통치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농업과 백성에 뒀고, 이를 위해 천문학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세종, 조선의 역법을 완성하다

日食 ... 以術者李天奉推步先一刻, 杖之.
일식이 있었다 ... 술자 이천봉이 일식을 관측하면서 1각(15분)을 앞당긴 이유로 곤장을 쳤다.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1월 1일

고대에는 국가가 시간은 물론 날짜와 절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안정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변화를 연구해 역법, 지금의 달력을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조선 초기까지 우리나라는 중국의 역법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위도의 시간과 잘 맞지 않아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옛날 달력에는 좋은 날과 나쁜 날이 적혀 있는데 달력마다 다르고, 시기도 맞지 않았습니다.

禮曹上葬用三月, 踰月之制.
예조에서 장례는 3개월과 유월(사망 후 달을 넘겨 장례를 지냄)의 제도를 쓰자고 계문(啓聞)을 올리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태종 17년(1417) 6월 1일

뒤이어 당시에는 최신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라비아역법을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교정한 ‘칠정산외편’을 만들게 했습니다. 이때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조선의 천문학자 이순지입니다. ‘칠정산외편’을 만들 때 그는 당시의 역법 이론들을 모두 분석하고 수도 한양뿐 아니라 백두산, 강화도 마니산, 한라산 등 주요 지점들의 북위를 측정했습니다.

칠정산을 완성한 후 조선은 일식과 월식, 일출과 일몰 시각 등을 한양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고 이 역법을 바탕으로 매년 역서를 간행하고 배포했습니다.

조선 전기에 1만부 정도 발행되던 역서는 조선 후기에 30만부 이상 발행될 정도로 베스트셀러라 할 수 있는데요. 백성들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지침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세종대앙부일구는 시각과 절기를 모두 알 수 있는 해시계이다.
2.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한 사람은 장영실이다.
3. 고려청자만의 독창적인 문양기법은 상감기법이다.
4. 역법은 천체의 주기적 현상을 기준으로 하여 날짜, 절기를 정하는 방법이다.

해설

1. 천문 관측 기구의 발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였던 조지프 니덤(1900~ 1995)은 15세기 초와 17세기 초가 조선 천문학이 큰 도약을 이룬 두 시기라고 봤다.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들어선 뒤 과학에 관심이 많은 세종대왕의 주도로 천문학에서의 대도약을 이룰 수 있었다. 니덤은 “15세기 조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첨단의 관측의기를 장비한 천문기상대를 소유했다”고 평가했다.

세종은 학문 연구의 기반을 조성하고 연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집현전을 만들고 경연을 적극으로 활용했다. 세종의 명이 있은 지 7년에 걸쳐 경복궁 서쪽 후원에 천문관측시설을 건축하고 한양의 북극출지(北極出地)를 측정했다. 간의를 비롯하여 혼의, 혼상,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규표, 자격루, 옥루 등을 제작 설치하였다. 이것을 세종의 간의대 사업이라 부르며, 간의대는 한편으로 왕립천문대였다. 세종의 간의대 사업은 훈민정음 창제에 버금가는 역사적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은 왕립천문대를 만들고 난 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으니 농사는 의식의 근원이고 왕정의 급선무이다”라고 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중심에 농업이 있었고 그 배경에 천문학이 있었다.

경복궁에는 큰물시계를 설치하기 위해 지은 전각이 두 개 있었다. 흠경각(欽敬閣)과 보루각(報漏閣)이 바로 그것이다. 보루각은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自擊漏)가 설치된 전각이고, 흠경각은 세종이 애용한 물시계이자 장영실이 만든 옥루(玉漏)가 있는 곳이다. 보루각은 1433년인 세종 15년 가을에 완성되었으며, 그 안에 설치한 자격루는 이듬해인 세종 16년 7월 초하루부터 표준시간을 알려주기 시작하였다. 자격루는 보루각이라고 이름 붙은 건물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격루를 보루각과 합해서 보루각루(報漏閣漏)라고도 부른다.

흠경각은 대호군 장영실이 건설한 것으로 그 규모와 제도는 세종이 지시한 것으로,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고 했다. 집 이름을 흠경이라 한 것은 『서경』 「요전」 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에서 따 온 것이다. 다시 말해 관상수시(觀象授時)를 실천하는 집인 셈이다. 세종은 천문대를 후원인 경회루에다 설치하여, 수시로 점검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천추전 서쪽 뜰에다 한 칸 집을 세운 것이 흠경각이다. 세종은 흠경각을 수시로 드나들며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천상의 시간을 지상의 시간으로 하사받아 백성들에게 알려 주고 천도(天道)의 차고 비는 이치를 깨달아 왕도정치를 베푸는 귀감으로 삼았다.

흠경각 안에 설치된 천상의 물시계인 옥루에는 종이로 만든 산이 있었는데 이 산 사방에는 『시경』에 나오는 빈풍도(瀚風圖)에 따라 춘하추동의 풍경과 계절에 따른 농사짓는 풍경이 갖추어져 있었다. 세종은 이를 바라보며 국가 통치에서 백성과 농업이 가장 중요함을 되새기고자 했다.

조선 초기 세종 때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시계들이 제작되었다.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그리고 행루 등이 만들어졌고, 낮과 밤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주야 겸용의 해시계와 별시계를 통합한 일성정시의도 창제되었다. 그중에 앙부일구는 너무나 유명한 우리 역사 속의 독특한 해시계로 유명해졌다.

세종 때의 대표적인 해시계는 ‘앙부일구(仰釜日晷)’이다. 보통 대부분의 해시계는 해 그림자를 받는 시반면(時盤面)이 평평하다. 그런데 이 앙부일구는 반구형의 오목한 시반면을 갖고 있다. 반구형의 시반면 내부에 시각을 읽을 수 있는 눈금이 그려져 있다. 보통 해시계는 시각을 표시한 원반이 평평하지만 앙부일구는 오목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앙부일구의 가장 중요한 구조는 해 그림자를 만드는 뾰족한 막대기인 영침과 해 그림자를 받아 시각을 읽는 둥그런 반구(半球)형의 시반면이다. 시반면은 둥그런 구(球)를 정확하게 반으로 잘라 오목한 내부 면에 눈금을 새겨 넣었다. 이 반구형의 시반면 주둥이 부분에는 보통 방위를 새겨 넣었다. 시계 바늘에 해당하는 시침인 영침은 시반면 주둥이 정남 위치에서 관측지의 북극고도(조선의 한양 북극고도) 만큼 내려간 지점을 남극으로 해서 정확히 북극을 향하도록 시반면에 박혀있다. 영침의 끝 부분은 뾰족한 바늘 모양으로 정확하게 시반면 주둥이의 정 중앙에 위치한다. 시반면에 그려져 있는 눈금은 영침과 수직하게 13개의 절기선이 그려져 있고, 절기선에 수직하게 시각선이 그려져 있다. 시각선은 정 중앙의 자오선을 오시 정초각 0분으로 해서 좌우에 묘시부터 유시까지 낮 동안의 시각을 잴 수 있도록 자오선에 평행한 방향으로 그려져 있다. 절기선은 해 그림자만 보고도 24절기를 알 수 있도록 13개의 선이 시각선에 수직한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 춘추분선을 정 가운데의 적도선으로 해서 맨 위쪽에는 동지선, 맨 아래쪽에는 하지선이다.

조선 시대에 물시계를 경루(更漏)라고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종루 근처에 금루방이라는 관청을 두었는데, 금루방에는 물시계인 경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시계는 밤낮없이 시간을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항상 사람이 지키고 봐야했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세종대에 이르러 물의 부력과 낙하하는 공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저절로 소리를 내게 하여 시간을 알리는 자동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가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졌다. 1434년의 일이다. 자격루는 세종의 인도주의적 정치 요체가 들어있는 물시계이다. 자격루는 세종의 바람대로 시각을 맡은 나무 인형의 관원을 만들어 물시계를 지키는 관원의 노고를 덜어 주었다. 자격루는 경회루 남쪽에 세운 보루각이라는 전각에 설치하여 운영했기 때문에 보루각루라고 불렀으며, 임금이 거처하는 대궐에 있어서 금루(禁漏)라고도 불렀다. 자격루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종과 북, 징을 쳐서 각각 경점 등 밤시간을 알리고 시를 알리는 팻말을 보여주어 시간의 경과를 자동으로 알려주는 자동물시계였다.

일반적으로 물시계는 한 물통에서 다른 물통으로 흐르는 물량이 시간의 흐름과 정비례하게 만들어졌는데 물이 고이는 데 따라 시간잣대가 떠오르면서 시간눈금을 가리킨다. 자격루에서는 더 나아가 시간 잣대가 올라가는 힘으로 구리구슬을 굴러 떨어지게 하여 지렛대장치로 로봇인형이 북과 징을 치고 시간을 알리게 하였다. 보루각 안에 설치되었던 자격루는 높은 곳에서 물을 공급하는 물통(파수호) 4개를 놓고 그 밑에 물 받는 물통(수수호) 2개를 놓았는데 수수호에 고이는 물이 점점 높아지는 데 따라 시간잣대가 위로 떠오르게 되고 그것이 쇳덩어리를 받쳐 들고 있는 받침판을 떠밀어 주므로 구리구슬이 굴러 떨어진다. 종래 중국의 물시계는 수수호가 1개였으나 자격루는 수수호가 2개이다.

자격루가 완성된 지 4년 후, 1438년(세종 20)에 장영실은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를 완성하였고, 세종은 경복궁 침전 곁에 흠경각을 지어 그 안에 설치하도록 했다. 옥루는 지금 남아 있지 않아 아쉽게도 그 형태를 완벽히 알 수는 없다. 전해지는 기록으로 추측해 볼 뿐이다. 옥루는 자격루와 같은 물시계 장치뿐만 아니라 태양의 운행 등 천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까지 있는 천문시계이다. 또한 동지, 춘분, 하지, 추분까지 알려 주는 자동 종합물시계였다.

국가 통치에서 낮 시간보다 밤 시간의 통제는 중요한 것이었다. 백성들에게 인정과 파루시간을 알려주어 통치를 원활히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물시계가 필요했다. 조선 세종대에 자동물시계인 자격루의 제작으로 조선은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줄 수 있었다.

2. 자주적 역법의 완성

옛날 농경 사회에서 군주의 중요한 책임 중 하나는 백성들에게 씨 뿌릴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에게 ‘때’라는 것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고 고기를 잡을 때를 바로 아는 것이 살기 위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다.

조선 건국과 함께 역법(曆法)은 고려 말과 같이 수시력․대통력을 사용하고 일부는 선명력을 썼으나, 1433년(세종 15)에 교식(交食: 일․월식의 계산법)과 오성(五星)만이 입성(立成: 역법 계산에 필요한 천문상수들을 적어 놓은 수식표)이 없었다. 세종은 선왕인 태종의 뜻을 이어 조선의 달력을 천문 현상과 합치되도록 했다. 세종은 1433년(세종 15)에 신하들에게 중국 명의 대통력을 연구해 역법의 원리를 완전히 소화하도록 지시했다. 교식(일․월식의 계산법)과 오성(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만이 입성(역법 계산에 필요한 천문상수들을 적어 놓은 표)가 없다 하여 정인지․정초․정흠지 등에게 계산하게 하고, 명의 원통이 편찬한 『대통통궤(大統通軌)』에서 오류를 조금 고쳐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하게 한 것이다. 뒤이어 이순지·김담 등에게 회회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교정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만들게 했다. 당시 역법 연구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사람은 이순지와 김담이었다. 이들은 당시 사용하던 역법들이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는 원인과 그 근본적인 개선대책을 찾아내기 위하여 당시의 역법 이론들을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검토하였다. 또한 수도 한양뿐 아니라 백두산, 강화도 마니산, 한라산 등 주요 지점들에 달력 편찬을 책임진 관리들을 파견하여 각지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였다.

한국을 비롯한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에서 반포한 달력 즉 역서(曆書)를 받아 사용하거나 중국 역법에 따른 역서를 사용하였다. 이는 시간이 곧 정치적 권위의 상징이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에서 역(曆)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용된 것은 진시황 26년(B.C 221)부터였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날짜의 통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통력에 뒤이어 1654년부터 사용된 시헌력은 상용력이었던 만큼 조선후기 역서 가운데 가장 많이 발행된 역서이다. 불과 4,000건만 인쇄되었던 시헌력은 1762년 10,300축(약 20만 부)를 시작으로 점점 증가하여 1791년 이후에는 약 1만5천축이 인쇄되어 관료가 아닌 일반인들도 그 이전보다 손쉽게 역서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762년부터 비교적 많은 양의 역서가 인쇄되어 현재 남아 있는 역서들은 이 시기 이후에 발행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시헌력의 달력 체제를 보면, 첫면에 권두서명과 12달의 대소가 각각 적혀져 있으며, 그 하단에 24기의 입기(入氣) 시각이 기록되어 있고, 그다음에 연신방위지도(年神方位之圖)가 시작되고 있다. 이어서 날짜와 일진을 중심으로 그 위 칸에는 달의 삭망이 적혀져 있고 날짜의 아래 칸에는 일진(日辰)의 의(宜), 불의(不宜)가 각각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달의 삭망 시각 등 달과 관련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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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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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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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천문기기와 역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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