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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이곳은 일본 쓰시마.
매년 여름이면 쓰시마에선 에도시대의 중요한 행렬을 재현한 축제가 펼쳐지는데요, 이 축제는 과거 이 지역을 지난 조선인 행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조선인들은 왜 일본에 갔을까요?

조선시대 한류열풍을 주도한 통신사

세종 때 일본 막부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면서부터 조선과 일본의 공식적인 외교사절단으로 ‘통신사’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통신사의 왕래가 잠시 중단됐는데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는 정치적인 안정과 조선과의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통신사를 요청했습니다. 이때 통신사의 파견을 계기로 양국 간의 관계도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조선 역시 대외관계 안정을 위해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가 필요했고, 일본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신사를 보냈습니다. 이때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쓰시마가 양국간 외교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대규모 통신사 행렬에 필요한 많은 경비와 지원은 일본 각 지역의 다이묘와 막부에서 부담했는데요, 이는 통신사를 통해 막부의 권력을 대내적으로 과시하고 국제적인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통신사는 외교사절단 역할 외에도 양국의 특산물과 신문물을 교환하고 유교서적, 농사, 의학기술 등 지식과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또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는 문화사절단의 역할도 컸는데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자와 서화를 가장 좋아하여
글씨 한 글자와 말 한 마디만 얻어도
이를 보배로 간직하고 서로가 감상한다.
심지어 하졸(下卒)이라도 붓을 잡을 줄
아는 자라면 글씨를 요구하였는데...

- 임수간『동사일기(東槎日記)』1711년(숙종 37)

당시 조선의 문자와 서화를 감상하고 소장하려는 일본인들이 많았습니다.
통신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 매우 뜨거웠습니다.

구경꾼이 하천 주변에 구름처럼 몰렸다.
어른들은 뒤에 앉고 아이는 앞에 앉았는데,
통신사 행렬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으나
큰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 김인겸『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1763년(영조 39)

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는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행동 규제가 요구되었습니다.
이처럼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일본은 통신사 행렬의 모든 노정을 그림으로 기록하여 의례절차를 준비하는 중요한 자료로 남겼습니다.

화폭에 담은 평화와 우호의 여정, 통신사행렬도

일본에서 그린 통신사행렬도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정교한 것은 1711년 통신사행을 그린 것입니다.
1711년 5월 한양을 출발해 부산을 거쳐, 7월 쓰시마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에서의 행렬이 시작되는데요, 오사카와 교토 등 주요 도시를 지나, 10월에 에도에 도착한 후 그 다음 해 3월에 다시 조선에 귀국하는 약 10개월에 걸친 긴 여정이었습니다.

이때 쓰시마에서 오사카까지는 조선의 선박으로 이동하고, 오사카부터 교토 사이의 하천인 요도가와는 물길이 얕아 일본에서 제공한 화려한 장식의 금루선을 이용했는데요, 이 금루선은 막부 장군을 비롯해 상위 계층만 탈 수 있는 최고급 선박이었습니다.

통신사에는 외교사절을 대표하는 정사와 부사, 종사관 등 삼사와 제술관, 서기, 사자관, 화원 등 총 500명이 파견되었습니다.
이중에서도 말 위에서 기예를 펼치는 마상재는 일본에서 특별히 요청했을 정도로 현지에서 큰 인기가 있었습니다.

통신사행렬도는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그림인데요, 접대를 맡은 일본인까지 총 2천여 명이 이동한 대규모 행렬이었습니다.
1711년 통신사행렬도는 총 4권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도중행렬도〉는 오사카에 타고 온 배를 남겨두고 에도를 향해 육로로 이동하는 통신사 행렬의 모습입니다.
맨 앞에는 일본의 무사들이 통신사를 호위하고 그 뒤로 깃발을 든 기수들과 의장대,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와 마상재 등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후에 군관이 호위하는 국서를 담은 가마인 용정이 지나고, 그 뒤에 정사 행렬이 등장합니다.
통신사의 복식은 정사부터 하관까지 화려했는데요, 정사를 비롯한 삼사는 일상복인 편복을 착용했습니다.

〈도착 및 귀로행렬도〉는 공복으로 갈아입고 에도로 이동하는 모습으로, 통신사의 귀로행렬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행 방향만 바뀌기 때문에 따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행렬의 순서와 기수, 의장대, 악대, 군관의 복식은 처음 도중행렬 때와 모두 동일하지만, 삼사 이하 상관까지는 모두 오사모에 흉배가 있는 공복을 갖춰 입었습니다.
〈등성행렬도〉는 에도에 도착해서 막부장군에게 왕의 국서를 전달하러 가는 과정으로, 통신사의 외교행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국왕의 외교문서인 국서는 가마모양의 용정에 담아 옮겨졌는데요, 이 때 삼사는 금관에 조복을 입었습니다.

국가 간 사신 왕래가 끊인 지 어느덧 30년이라,
듣건대 전하께서 선대의 터전을
잘 이어받아 널리 구역을 다스린다 하니, ...
오직 좋은 계책에 더욱 힘쓰고
길이 교의를 굳게 하길 바랄 뿐입니다.

- 1711년 조선 숙종의 ‘국서’ 中

에도성에 도착한 통신사는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식과 다례를 진행하고, 막부장군의 회답국서와 답례품을 받아 귀국했습니다.
네 번째 그림은 쓰시마 태수가 통신사행을 즈음하여 에도의 막부장군에게 알현 가는 행렬을 따로 제작한 것입니다.

1711년 통신사행렬도는 통신사의 인물과 복식 등을 정교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풍속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이 특징인데요, 인물들의 실감나는 동작들과 다양한 표정까지 풍부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했습니다.

이처럼 통신사행렬도는 조선과 일본의 우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록 유산이며, 당시의 외교와 문화사적 측면까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과 일본의 통신사 기록물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조선시대 통신사가 지나간 그 길을 따라,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화려한 행렬을 재현하는 축제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고, 양국의 평화와 우호를 바라는 학생들이 벽화를 제작하는 등, 일본인들의 삶과 문화에 통신사의 콘텐츠가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조선시대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의 명칭은 통신사이다.
2. 통신사행렬도는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행렬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3. 조선 국왕의 외교문서인 국서는 가마 모양의 용정에 담아 옮겨졌다.

해설

1. 통신사의 일본 파견 배경

‘통신사(通信使)’란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신뢰’를 통하여 교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에서 일본 무로마치 막부와 에도막부에 파견하였던 외교사절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통신사’란 명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13년(태종 13) 중국의 왜구 토벌을 앞두고 일본 정국을 탐색하기 위한 사행이었고, 이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여 파견한 것은 1429년(세종 11)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敎)의 막부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사행이었다. 막부장군은 막부의 최고 장군으로 ‘대군(大君)’또는 ‘관백(關白)’이라고 칭하였다.

조선전기 조선국왕사의 일본 파견이 61회, 막부에서 보낸 일본국왕사의 조선 방문도 60여회에 이르렀다. 이중 ‘통신(通信)’의 명목으로 파견된 것은 임진왜란 이전에 약 18회였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서는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쓰시마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쓰시마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섬의 경제를 조선과의 교역에 의존하였다. 1572년에 부산 두모포에 설치된 왜관을 통해 쓰시마 상인들은 시장을 열어 조선에서 교역활동이 가능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이마저도 단절되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후, 일본의 전국(戰國)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세운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에도성(江戶城 : 현재 도쿄)을 정치적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에도막부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쓰시마는 에도막부가 성립되자 국서를 위조하면서까지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총력을 기울였다. 1609년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막부는 쓰시마번을 이용하여 양국 간의 교역을 재개하려 하였고, 조선은 국교 정상화의 선행조건으로 국서(國書) 요구와 왕릉을 훼손한 왜구의 압송, 전쟁 포로의 송환을 요구하여 관계 정상화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과 국서 위조의 후유증에도 당시 통신사 파견이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은 조선과 일본 모두 ‘명과 청의 교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안으로는 내정을 확립하고 밖으로는 새로운 대외 관계의 안정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도시대 통신사는 도쿠가와 막부 전기에 정치적 정통성을 확인하는 요소가 되었고, 후기에는 대외적으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일본의 위치를 재조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양국 사이 관계를 정상화하는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2. 1711년 통신사행과 외교적 현안

1711년(숙종 37) 통신사의 일본 파견은 1710년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의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파견된 통신사의 구성 중 삼사는 정사 조태억, 부사 임수간, 종사관 이방언이었고, 외교문서의 초안을 맡은 제술관으로 이현, 화원 박동보, 마상재 지기택 등 총 500명이 참여하였다. 통신사의 원역은 일본에서의 접대를 기준으로 상상관 · 상관 · 차관 · 중관 · 하관의 5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상상관은 사행에서 핵심 업무를 담당하는 정사 · 부사 · 종사관의 삼사와 당상역관이 이에 해당한다. 삼사는 사행에서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상징적 존재였고, 당상역관 3명은 당상관 이상에서 선발하여 일본에서 외교적 실무를 담당하였다.

통신사의 노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에도에 이르기까지 육로 2,545리, 수로 3,285리로 모두 5,830리의 거리였다. 통신사 일행이 쓰시마에 이르면 여기서부터는 쓰시마 번주(藩主)가 통신사와 동행하는데, 아이노시마(藍島), 가미노세키(上關), 우시마도(牛窓), 무로쓰(室津), 효고(兵庫)를 거쳐 오사카에 이른다. 오사카에 닻을 내린 통신사는 귀국 준비를 위해 격군 129명을 이곳에 남기고 낮은 강바닥에 알맞은 금루선으로 갈아타고 요도가와(淀川)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다. 요도가와에서 교토에 상륙한 통신사가 오오츠(大津)를 경유하여 일행이 나고야를 지나 오카자키(岡崎)에 들어가면 에도에서 막부장군이 보낸 사신이 나와 환영하고 시즈오카(靜岡), 도카이도(東海道)를 지나 통신사 일행은 시나가와(品川)에서 공복으로 갈아입고 에도에 이르렀다.

육로 이동 과정에서 통신사는 막부 장군과 통신사만 사용하였던 특별 전용로인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인 하마가이도(濱街道)를 지났는데, 교토와 에도 사이 약 30km에 이르는 주요 도로로 조선국왕의 국서를 가지고 통신사가 왕래했던 길이다. 통신사행의 육로 노정 중 얕은 강을 건널 때에는 특별히 만든 선교(船橋)를 이용하였다.

이때 통신사 일행은 외교문서인 조선국왕의 명의로 일본 막부장군에게 전달할 국서와 별지에 예물로 보내는 선물의 종류와 수량을 적은 별폭(別幅)에 근거하여 물품을 준비하였다. 서계(書契)는 예조참판이나 참의 또는 좌랑의 명의로 상대방의 지위에 상응한 쓰시마 번주와 막부의 외교 실무자의 직명(職名)으로 작성되었다.

막부에서 통신사의 파견 요청은 대부분 막부 장군의 승계와 관련된 것이었고, 이에 대한 외교적 실무는 쓰시마에서 담당하였다. 막부의조선 외교 및 통신사 왕래에는 쓰시마 종가(宗家)의 역할이 컸다. 쓰시마 도주는 통신사의 에도 왕래 총책으로 조선 관련 외교 실무를 맡았고, 막부에서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업무도 쓰시마번이 주관하였다. 쓰시마번의 종가는 부산의 왜관에서 공문서를 취합하고 소정의 격식을 갖추어 그에 의해 통신사 행렬의 도중 이동, 에도성에서 의례, 향응까지 담당하였다.

통신사절단의 에도 왕래에 일본은 막대한 비용을 사용하였는데, 사절단을 접대하기 위해 교토와 에도 사이에 53개 역에서만 인원 23만 550명과 준마 4만 1,234필을 동원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막부의 로쥬(老中)가 책임자가 되고, 빈객을 대접하는 봉행(奉行)을 임명하여 통신사가 지나는 지방의 모든 다이묘(大名)에게 복귀 명령을 내렸다. 다이묘는 통신사가 머물 숙소의 신축과 수리, 호행하는 선단(船團)의 편성과 훈련, 도로의 정비, 인력과 말의 조달에 부담하는 비용을 자신의 번의 재정으로 충당해야만 했다.

3. 1711년 통신사행렬도

통신사행렬도는 한일 양국의 우호를 보여주는 대표적 기록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통신사 관련 행렬도는 50여종이 전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1711년 통신사행렬도로 막부 로쥬의 명령으로 쓰시마 종가에서 제작한 것이다. 통신사행렬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정교하게 제작된 작품이 현재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1711년 통신사행을 그린 통신사행렬도는 기록적 성격을 띤 반차도 형식으로 행렬의 순서와 배치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총 네 부분으로 제작되었다. 제1권 〈조선국 신사 도중 행렬도(朝鮮國信使道中行列圖)〉는 오사카에서 배를 정박시킨 후 에도를 향해 육로로 이동하는 통신사행렬을 묘사하였다. 제2권〈조선국 신사 도착 및 귀로 행렬도(朝鮮國信使參着歸路行列圖)〉는 통신사가 에도에 들어가기 전 시나가와(品川)에서 공복으로 갈아입고 이동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때 통신사의 행렬은 왕래 시의 복식과 일치했기 때문에 에도를 향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모습만 묘사하고 귀로 행렬은 따로 제작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는 1636년〈통신사 귀로 행렬도〉는 에도에서 조선을 향하는 통신사의 귀로 행렬 모습으로, 행렬의 방향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제3권〈조선국 신사 등성 행렬도(朝鮮國信使登城行列圖)>는 1711년 막부 장군에게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일에 에도성으로 이동하는 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것으로, 당시 사행의 등성행렬을 묘사한 것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작품이 유일하다. 제4권 〈조선국 신사 내빙 시 쓰시마태수 참착 귀국 행렬도(朝鮮國信使來聘之節宗對馬島守參着歸國行列圖〉는 1711년 통신사가 에도에 들어갈 때 쓰시마 태수 행렬이 에도에 막부장군을 알현하러 가는 행렬을 따로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루마리 그림에는 조선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쓰시마 태수의 의장을 앞세우고 쓰시마 소속 가노(家老)와 무사들이 함께 이동하는 행렬을 그린 것이다. 네 작품은 권당 길이가 40미터 내외 규모의 두루마리 4권으로 구성되었고 해당 그림마다 통신사의 상상관과 상관의 복식, 삼사가 타는 가마도 차이를 보여 내용 구분이 용이하다.

사절단이 지나가는 노정에는 통신사 행렬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구경하기 좋은 자리는 비싼 값에 매매되었다. 이들의 통신사에 대한 관심 고조는 일본의 쇄국정책에 의한 타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임진왜란으로 집단 이식된 조선 문화에 대한 관심의 고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행렬도에 나타난 군중들은 거리에 맞대어 화려한 장식을 한 상점과 노점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거나 거리의 구획에 따라 질서정연하고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외국사절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였으나 통신사가 지날 때 군중의 행동을 규제했던 막부의 칙령 때문이기도 했다.

1711년 통신사행에 즈음하여 인기 있는 우키요에 화가들이 통신사의 행렬을 묘사한 목판화나 목판삽화들을 모아 미리 제작한 행렬도가 전한다. 이들 목판화 중에는 18세기 유명한 우키요에 화가 작품도 전하는데, 통신사 행렬을 직접 보고 제작한 것이 아니라 통신사가 에도에 들어오기 전에 기존의 통신사행렬도를 참고로 하여 제작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통신사 행렬과 같은 대대적인 행사에 편승하여 거리에서 한 장짜리 출판물이 널리 판매되었다. 이렇듯 통신사행렬도를 목판화로 제작하여 판매한 것은 에도시대 막부의 고위층뿐만 아니라 일본의 서민문화에도 통신사 행렬이 큰 반향을 일으켰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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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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