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검색팝업 닫기
목록보기
시나리오

한 번쯤 들어보고 써 본 말들이죠? 모두 감염병을 가리키는 표현들로 예로부터 사용돼 왔는데요.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감염병
그만큼 감염병은 오래 전부터 우리와 함께 해 왔습니다. 역사 속 감염병! 그 이야기를 만나볼까요?

감염병을 귀신의 소행이라 믿었다?

감염병은 바이러스와 세균, 기생충 등이 몸에 침입하여 발병하는 질환인데요.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위기에 빠뜨리는 등 감염병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해 왔습니다.

역병이 크게 돌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22년)

12월에 눈이 오지 않고 큰 역병이 돌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5 (256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역병이 들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B.C. 15년)

선사시대부터 인류를 괴롭혀 왔다는 감염병!
우리 역사에는 삼국시대부터 등장하고 있는데요. 사람 간 전파되는 전염성이 있다 하여 염병 혹은 역병이라 불렸습니다.

염병, 역병, 이질 세 가지 재앙이 또 번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그 수를 셀 수가 없다.

-구상덕 『승총명록』 / 영조 8년(1732) 12월 29일

풍부한 기록이 전하는 것은 조선시대인데요. 조선 전기에는 장티푸스로 추측되는 온역, 여역이 주로 발생했으며 특히 영조 25년에는 역병으로 인한 민간의 사망자 수가 거의 50에서 60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요.

이때에 여역이 서로(황해도나 평안도)에서부터 일어나서 (중략) 민간의 사망자가 거의 5, 60만이나 되었다.

-『영조실록』 영조 25년(1749) 12월 4일

조선을 위협했던 대표적인 역병으로는 장티푸스와 홍역, 콜레라, 두창 등이 있었고 두창은 천연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열과 장염을 유발하는 장티푸스는 통일신라 때부터 유행했고요.

왕년의 온역과 지난 겨울의 마진(홍역)으로 죽은 자가 연이었으니 전국이 마찬가지였다.

-『영조실록』 영조 29년(1753) 10월 3일

근래 여역과 두진(천연두와 홍역)으로 죽은 남녀가 몇 천 명인지 모를 정도인데…

-『영조실록』 영조 29년(1753) 6월 3일

홍역은 어린 아이의 발병률이 매우 높았으며 천연두는 발병 2주 안에 사망할 정도로 무서운 역병으로 꼽혔습니다. 특히 고열과 함께 온몸에 물집이 생기는 천연두는 회복되더라도 흉터를 남겼는데요. 1774년 무과에 합격한 이들을 보면 18명 중 3명의 얼굴에 곰보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19세기 초, 조선에 유입됐는데요.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 괴질이라 불렸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역병의 원인을 억울하게 죽은 귀신 때문이라고 믿기도 했는데요. 천연두의 신을 호구마마로 높여 부르며 굿이나 제사를 지내고 부적을 붙이는 등 미신 행위로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정체 모를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던 것 같죠?

조선시대에도 방역 시스템이 있었다?

오늘날 감염병은 한 지역에서 발병해도 세계적 대유행으로 번지기 쉬운데요. 코로나19의 유행 속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우리의 방역시스템! 그런데 이와 유사한 방역 체계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정조는 홍역이 유행할 조짐을 보이자 병자들을 조사하고 치료할 구료절목을 만들어 반포했습니다.

사족, 상민, 천민 가운데 매우 빈궁한 자에게는 약의 지급을 허락한다.

- 『일성록』 정조 10년(1786) 4월 21일

병을 진찰하여 증세를 논한 것은 몇 건이며 지급한 약물은 몇 환, 몇 첩이며 (중략) 5일 간격으로 보고한다.

- 『일성록』 정조 10년(1786) 4월 21일

몇 몇 항목을 살펴보면 약재의 지급과 관리는 물론 응급 왕진과 진료 통계 등에 대한 것까지 일종의 방역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또 한양 도성 밖에 병자들을 격리하여 치료하는 등 감염 확산을 막고 곡식을 나눠주어 생계 걱정을 덜어줬습니다.

바야흐로 여질이 점점 기승을 부려 사람들이 대부분 출막하니…

- 구상덕 『승총명록』 , 영조 26년(1750) 1월 7일

걸식 노파가 구덩이 안에 엎드려 있는데 (중략) 미음을 먹여 굶어 죽는 것을 면해 주었다.

- 구상덕 『승총명록』 , 영조 3년(1727) 11월 24일

각 지역의 관리나 지역민들의 역할도 컸는데요. 향약의 가르침에 따라 병자를 격리하고 빈민을 돌보는 등 환난상휼을 실천했습니다.

“전염병이 돌면 어떻게 하냐면 농사를 서로 돌아가면서 지어 준다든지 또는 약재를 공동으로 구입을 해 가지고 치료해 준다든지 하는 것을 지역민들이 하나의 지역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덕목으로 그런 제도들을 만들어놓은 거죠. 이런 (공동체의 역할이) 덧붙여지지 않으면 방역은 국가 힘만으로는 되지 않거든요.”

김호 교수 /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감염병은 격리도 중요하지만 적극적인 치료도 중요한데요.

비록 신기한 처방은 아니지만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처방법이 되겠습니다. (중략) 즉시 양의사(혜민서와 전의감)로 하여금 한글과 한자를 섞어 번역하고 인쇄하여 전국에 내려 보내소서

-『정조실록』 정조 10년(1786) 5월 28일

조선시대에는 역병이 발생하면 치료법과 처방을 전국에 나누어 보냈습니다. 중종 때 한글로 번역하여 반포한 간이벽온방과 광해군 때의 신찬벽온방이 대표적인데요. 신찬벽온방에는 다양한 처방들과 함께 감염을 예방하는 간편한 방법이 소개돼 있어 백성들이 활용하기에 좋았습니다.

또 정조 때는 지방의 처방전을 모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는데요. 승마갈근탕이 대표적입니다.오랫동안 해열제로 활용돼 온 승마갈근탕은 홍역이나 감기, 천연두에 효과가 있었습니다.

“승마갈근탕은 동의보감에도 풍열이나 두통에 쓸 수 있는 처방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비교적 약재의 가짓수가 적으며 산에서 칡(갈근)이나 승마, 작약 등을 손쉽게 캘 수 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도 쉽게 복용할 수 있는 처방이었습니다.”

최현명 한의사

한 영국인에 의해 우두법이 널리 확산된 후, 천연두는 1980년에 이르러 지구상에서 종식됐는데요. 우두법은 건강한 사람의 몸에 우두에 걸린 소의 바이러스를 접종함으로써 면역력을 만드는 예방접종법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조선에 우두법이 들어오기 전부터 천연두를 연구해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다산 정약용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인두법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인두법은 건강한 사람의 몸에 천연두를 앓는 사람의 바이러스를 접종하는 예방접종법인데요. 정약용은 천연두와 홍역 치료서인 『마과회통』을 완성했습니다. 『마과회통』에는 천연두 딱지를 가루로 만들어 코로 흡입하는 한묘법 등 인두접종법이 기록돼 있는데요. 후에 서양의 우두법 연구 자료를 입수해 우두법의 효과는 물론 접종방법 등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접종하는 일은 당시 받아들이기 힘든 의술이었는데요.

“선구자들에 의해서 여러 지역에서 종두법(천연두 예방접종)을 시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 선생님이 강진에 유배를 가 있던 1807년에도 경상도에서 종두를 시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 새로운 처방들을 실험하는 사람들이 있구나’하고 안도했던 기록을 볼 수가 있고 이후에도 1820년대, 1830년대에 경상도 지역에서 인두를 이용해서 천연두를 예방해 보려고 하는 그런 시도들이 있었던 기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호 교수 /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선구자들의 앞선 노력이 조선말, 거부감 없이 우두법을 받아들이고 확산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 것인데요. 코로나19로 인한 전례 없는 팬데믹 상황!

역병과 맞서 싸워 온 역사와 지혜 속에서 이 또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조선 후기 치명적인 역병으로 홍역천연두 등이 있었으며 조선말 콜레라가 창궐했다.
2. 정조는 홍역을 대비해 12개 조항의 진역구료절목을 만들었다.
3. 조선시대 천연두 예방접종방법으로는 인두법우두법이 있었다.

해설

2021년 현재 ‘코로나’가 전 세계를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수년간 이어진 ‘판데믹(pandemic)’은 일상용어로 자리잡을 정도이다. 본 동영상(한국의 전염병)은 ‘한국사 속의 감염병’을 주제로 삼아 판데믹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지혜로 삼고자 한다.

사실상 인류의 역사는 감염병과의 투쟁이요 공생이었다. 농업과 목축의 시작이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할만큼 그 어두운 이면에는 감염병의 유행이 도사리고 있었다. 소에서 천연두가, 그리고 개로부터 홍역이, 조류에서 인플루엔자가 사람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상식이다. 또한 인류가 아시아와 유럽 등지에 서로 떨어져 있다가 점차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역병의 전파 또한 불가피했다.

한반도 역시 고대부터 감염병의 유행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한반도는 중국을 통해 곧바로 세계와 연결되었고 이로 인해 감염병이 발생할만한 ‘역학(疫學) 생태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미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고구려에 역병이 들어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시대는 물론 자료가 가장 풍부한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역병 발생이 기록되어 있다. 가령 1525년(중종20) 3월 “역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여 열 집 가운데 아홉이 비었다”는 참혹한 상황이 발생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역병을 여역, 온역, 두창이나 홍진 등 다양하게 불렀다. 16~17세기를 큰마마(천연두)의 시대라 한다면 18세기는 작은마마(홍역)의 시대라 부를만 했다. 18세기 경상도의 고성에 살았던 구상덕은 1732년 한 해를 회상하면서 세 가지 역병이 한꺼번에 유행한데가 기근만저 심해 죽은 사람들을 셀 수 조차 없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면 어려서 홍역이나 두창을 앓은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례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했던 역병의 유행에 대응하여 조선 정부는 여러 가지 정책을 마련했다. 가령 정조는 서울(한성부) 지역을 역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료절목」을 만들어 선제적으로 역병 의심환자들을 관리했다. 당시 마련된 방역 규칙 10조를 보면, 전의감과 혜민서[兩醫司]가 서울의 도성 지역을 둘로 나누어 서부·북부·중부는 전의감이, 동부·남부는 혜민서에서 담당하여 역병 의심 환자를 진찰하고 처방전과 약물을 공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뿐만 아니라 역병 환자가 발생하면 일단 도성 밖의 병막으로 격리시킨 후 음식과 약물 등을 제공하고 회복 후에 귀가하도록 조치했다. 지방의 경우에도 약물과 병막을 준비하여 환자들을 격리 및 보호하고 관찰사로 하여금 자세한 내역을 보고하도록 했다.

한편, 역병의 원인을 전쟁이나 기근 등으로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소행으로 생각했던 풍속을 고려하여, 조선 정부는 각 지역의 지방관들에게 여제(厲祭:여귀를 위로하는 제사)를 위한 축문과 제물 등을 공급하기도 했다. 또한 해당 역병의 치료를 위해 여러 의사들의 경험방을 수집하고 이를 내의원의 의사들과 논의한 후 약물과 함께 지방에 보내기도 했다.

역병의 유행이라는 재난 상황의 극복은 국가의 대책으로는 불충분했다. 조선은 역병 발발에 맞서 향촌 지역민들의 호혜를 격려했다. 이른바 향약의 환난상휼 조항은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의리”를 강조함으로써 역병 극복을 위한 상호 협력을 강조했다. 조선의 향약 조목들은 자신의 지역만이 아니라 이웃 마을의 어려움에도 도움의 손길을 뻗치도록 했다. 어려운 시절을 헤쳐가기 위해서 연대의 감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역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고 예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이 시도되었다.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 이후 수많은 명·청대 신간 의서들이 조선에 수입되었는데,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과 박제가는 이러한 새로운 의학 지식에 기초하여 종두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마과회통(麻科會通)』 편찬에 이어 종두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중국의 의사 정망이(鄭望頤)의 『정씨종두방』과 『의종금감』의 종두 기술을 정리한 「종두요지」를 편찬하고, 이후 인두법 실험을 위해 영평현령이었던 박제가와 논의하기도 했다. 이후 다산은 인두법보다 안전하다고 알려진 우두법에도 관심을 가지고 제너의 우두법을 한역(漢譯)한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英咭利國新出種痘奇書)』를 입수하여 「마과회통보유」를 편술하기도 했다.

19세기 초반 중국에서 괴질(콜레라)이 유입되어 크게 유행하자, 정약용은 괴질의 정체를 다리의 근육통을 동반하는 마각온으로 규정하고, 중국에서 유입된만큼 중국에 치료법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1821년 정약용은 청의 고증학자 섭지선으로부터 콜레라 치료법을 입수하여 치료법을 공개하는 등 평생을 감염병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

한편, 19세기 조선에는 비록 우두법은 아니었지만, 종두시술(인두법)이 단절 없이 시술되고 있었고, 따라서 19세기 후반 지석영이 일본에서 우두법을 도입했을 당시 큰 거부감이 없이 수용될 수 있는 배경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단행본

  • 야마모토 타로(한승동 역), 2020, 『사피엔스와 바이러스의 공생』, 메디치미디어
  • 앨프리드 W. 크로스비(김기윤 역), 2006,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사』, 넥서스
  • 윌리엄 맥닐(김우영 역), 2005, 『전염병의 세계사』 이산
  • 엠마누엘 르 루아 라뒤리(稻垣 文雄 역), 2009 『氣候と人間の歷史:入門』, 藤原書店
  • 피터 볼 지음(김영민 역), 2011, 『역사 속의 성리학』, 예문서원
  • 김호, 2000,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일지사
  • 신동원, 2014, 『조선의약생활사』, 들녘
  • 신동원, 2004,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역사비평사
  • 이경록, 2020, 『조선전기의 의료제도와 의술』, 역사공간
  • 임형택, 2005. 『옛 노래, 옛사람들의 내면 풍경―신발굴 가사자료집』, 소명출판사
  • 전경목 외, 2010, 『승총명록으로 보는 조선 후기 향촌 지식인의 생활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5, 『勝聰明錄―18세기 고성현의 농가일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논문

  • 김건우, 2014, 「조선 후기 어느 지역민의 지방관 인식―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 『古文書硏究』 45
  • 김성수, 2013, 「默齋日記가 말하는 조선인의 질병과 치료」, 『역사연구』 24
  • 김성수, 2014, 「18세기 후반 의학계의 변화상―『欽英』으로 본 조선 후기 의학」, 『한국문화』 65
  • 김성수, 2015, 「조선시대 儒醫의 형성과 변화」, 『한국의사학회지』 28-2
  • 김엘리, 2009, 「『승총명록』을 통해서 본 경상도 고성의 진휼시책」, 『역사민속학』 30
  • 김호, 1996, 「正祖代 의료 정책」, 『韓國學報』 22
  • 김호, 1998, 「18세기 후반 居京 士族의 衛生과 의료―『欽英』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11
  • 김호, 2001, 「16세기 후반 경·향의 의료 환경―『미암일기』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64
  • 김호, 2015, 「1612년 온역 발생과 허준의 『新纂僻溫方』」, 『조선시대사학보』 74
  • 김호, 2016, 「‘以義順命’의 길―다산 정약용의 종두법 연구」, 『민족문화연구』 72
  • 박동욱, 2015, 「천연두, 그 아픔과 상실의 기억―장혼의 「記慽」을 중심으로」, 『우리어문연구』 52
  • 신동원, 1999, 「허준의 성홍열 연구―동아시아 최초의 보고서」, 『한국과학사학회지』 21-2
  • 신동원, 2006, 조선 후기 의약생활의 변화―선물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역사비평』 75
  • 이형대, 2003, 「18세기 전반의 농민 현실과 任癸歎」, 『민족문학사연구』 22
  • 정다함, 2009, 「조선 전기의 정치적·종교적 질병관, 醫·藥의 개념·범주 그리고 치유방식」, 『한국사연구』 46
  • 荒野泰典, 2000, 「콜레라가 전해진 길-중국 조선 루트의 검증」, 『島嶼文化』20

감염병과 방역
자료정보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