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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시대별로 간략히 서술되어 그 개념과 변천 과정, 성격 등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문화·예술이야기>는 한국사 속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주제별로 그 흐름과 변천 과정, 특징과 성격 등을 전문가의 해설을 기반으로 동영상 자료로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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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장엄한 아름다움이 압도하는 인류의 문화유산이자 심오한 유교의 이치가 녹아 있는 정신문화 유산, 종묘.
유형과 무형의 보물로 가득한 종묘의 이야기, 만나볼까요?

조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은?

종묘는 조선 왕실의 제사를 모시는 나라의 큰 사당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하늘로, 육신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는데요, 사당은 그 영혼을 모시는 곳으로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는 임금과 왕비의 혼이 담긴 신주가 봉안돼 있습니다.

고대 중국 주나라에서 기원한 종묘제도는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도입되었으며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나라의 근본으로는 종묘가 으뜸이다. (중략) (그리하여) 지난 해 부터 새로 태묘를 지었던 것이다. 조정에 있는 유신들은 소목의 위치와 제례의 절차를 의논하여 정하고 알리도록 하라. -『고려사』 성종 11년 (992년)

조선은 나라를 열면서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를 허물었으며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이곳에 ‘조선의 종묘’를 지었습니다.

임금은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고나서 반드시 종묘를 세워서 조상을 받들어 모신다. 이것은 자신의 근본에 보답하고 조상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니 매우 큰 도이다. -『조선경국전』

조선은 나라를 세우면서 종묘와 사직을 먼저 짓기 시작했는데요, 유교 국가인 조선에게 종묘는 그만큼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유교 이념에 비추어 볼 때, 종묘는 짓는 위치도 정해져 있습니다. 종묘는 궁궐의 동편에, 사직은 서편에 자리하도록 하였으며 궁궐에서 남쪽을 바라보았을 때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자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외대문을 들어서면 전돌이 깔린 길이 길게 뻗어 있는데요, 세 개로 나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종묘의 중심 건물인 정전이 나타납니다.

100m가 넘는 길이의 목조 건물.
19칸으로 나눠진 정전에는 조선의 열아홉 분의 임금과 서른 분의 왕비 신주가 서쪽으로부터 차례로 각 실에 모셔져 있습니다.

“종묘는 길례 즉, 제사 행위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엄숙하고 단정한 모습을 추구한 것이 가장 큰 건축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건물의 장식에서도 화려한 단청이나 화려한 다포 같은 형식의 공포를 사용하지 않고요. 익공이나 그야말로 붉은 색과 초록색만 쓰는 단청의 모습들을 취하고 있어서 (궁궐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조재모 교수 /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정전 주위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의 신주를 모신 공신당과 인간의 수명과 삶의 여러 가지를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이 있으며, 정전 옆에는 영녕전이 있습니다.

제사에 올릴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 제사 음식을 만드는 전사청, 임금이 목욕재계하며 제례를 준비하는 재궁, 제사가 시작되기 전, 임금과 세자가 서서 기다리는 자리인 판위, 그리고 제사에 바칠 희생을 살피는 성생위까지! 종묘의 곳곳에는 제례의 의미가 녹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혈식’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동물의 희생을 바치는 제사다’라는 의미입니다. ‘신들이 먹는 음식이다’라고 하는 초월적인 신에 대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게 혈식이고요. 특히 국가 제사에서 지내는 제사는 반드시 혈식, 희생을 잡아서 지내게 돼 있습니다.” 이욱 연구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종묘의 의미가 완전해지는 순간은 제례가 봉행되는 때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사계절이 시작되는 각 시기와 12월 동지가 한 달 정도 지난 납일.

이렇게 다섯 번의 대제를 기본으로 햇과일과 시절 음식을 올리는 천신제 등 나라에 기쁜 일, 나쁜 일이 있을 때에 이 곳 종묘에서 제사를 봉행하였습니다. 현재는 매년 5월에 국가 의례로 종묘대제가 봉행되고 있습니다.

600여 년의 긴 역사가 살아서 이어지고 있는 곳! 그래서 종묘에 더욱 매료되는 것이 아닐까요?

종묘 정전 길이가 100m가 넘게 된 이유는?

종묘 건축의 백미라 불리는 정전.
이곳에는 조선의 스물일곱 왕 중에서 열아홉 왕의 신주가 봉안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임금의 신주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곳은 영녕전입니다. 영녕전은 종묘 정전의 별묘 형식으로 만들어진 곳인데요.얼핏 보면 비슷하게 생겼어요. 긴 건물이고요. 가장 특징적인 차이는 영녕전은 중앙에 4칸의 지붕이 솟아 있는데요, 이 부분이 영녕전이 정전과 어떻게 다른가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일겁니다.” 조재모 교수 /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영녕전은 정전에 모실 수 없는 신주를 별도로 모신 사당입니다. 가운데 솟은 지붕 아래의 태실 4칸에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가 모셔져 있으며 양 옆으로 각각 6칸씩, 정전에 모시지 못한 임금의 신주가 이곳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임금은 정전에 모시고 어떤 임금은 영녕전에 모실까요? 조선이 처음 세운 종묘는 5칸의 신실에, 좌우에 1칸씩 협실이 있는 7칸 구조의 정전이었는데요,

천자는 7대의 묘를 건립할 수 있고, 제후는 5대의 묘를 건립할 수 있다 - 『예기』

천자 7묘, 제후 5묘라는 유교적 원리에 따라 5칸만으로 지어야만 했던 것이죠.

그런데 세종 대에 이르자 결정할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종이 승하하고 3년 상 후, 신위를 종묘에 모실 시점이 되자 정전에 이미 모신 다섯 신주 중 하나를 옮겨야 했는데요, 문제는 어떤 신주를, 어디로 옮길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덕이 있는 조상은 조(祖)나 종(宗)으로 삼아서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 군주 (불천위不遷位)로 받들어야 한다. -『조선경국전』

숱한 유교적 논의 끝에 나라를 세운 태조 임금은 조선의 시조로서 정전에 영원히 모시기로 하고 4대조가 넘은 신주들은 영녕전을 건립하여 그 곳에 모셨습니다.

이후에도 공덕이 큰 임금은 불천위로 정하여 계속해서 정전에 모시게 되었고 왕위 계승 문제와 정치적 이해에 따라 조선의 많은 임금이 불천위가 되면서 정전은 처음 7칸에서 11칸, 15칸, 19칸으로 차례로 증축되며 현재 모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종묘는 선왕을 제사 지내는 공간입니다. 이 말은 ‘인’과 ‘의’ 또는 ‘효’를 통해서 국가를 다스린 왕의 모습을 종묘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죠. 그러므로 유교의 정신 또는 조선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종묘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욱 연구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절제된 단순함 속에서 느껴지는 장엄한 아름다운 뿐 아니라 둘러보는 곳곳마다 깊은 의미가 녹아 있는 곳!
비어 있는 고요한 곳이라 여겼던 종묘는 알고 보면 조선 왕조의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곳입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조선의 유교적 이념을 상징하는 두 건축은 종묘와 사직단이다.
2. 종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추존된 왕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3. 조선 임금의 신주는 정전과 별묘인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해설

종묘는 선대 임금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국가 제례시설이다. 사도세자와 같이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분들을 포함하여,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엄숙한 공간이 바로 종묘다. 실록에도 “종묘는 조종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라 하여 종묘가 궁궐, 성곽과 함께 나라를 세운 이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물리적 요소임을 말하고 있다. 전통시대의 도성은 그 자체로 예제건축의 속성을 띤다.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며 군주로서의 예를 구현하기 위한 궁궐, 군주의 정통성 기반을 드러내는 종묘, 땅과 곡식에 감사하는 사직단이 도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다. 이들 시설은 분명한 건축구성 원칙을 갖고 있었으며, 도성 내에서의 입지도 규범적이었다. 유교 문명권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예치사회 구현의 주요한 참조점이었던 『주례(周禮)』에는 ‘좌조우사(左祖右社) 면조후시(面朝後市)’라 하여 종묘는 동편에, 사직은 서편에 입지하며, 궁궐은 앞쪽에, 시장은 북쪽에 위치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조선의 한양도성 역시 이 개념을 따라 주요 시설의 입지를 정하였다. 다만 경사진 지형 조건에 알맞게 궁궐은 상대적으로 높은 지형인 북쪽을 택하였던 차이가 있다. 조선이 개국하여 한양으로 천도할 때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궁궐과 종묘, 사직의 위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종묘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입지와 좌향(坐向)을 결정하고 영건할 정도로 중요한 시설이었다.

즉, 종묘는 곧 국가의 근간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지, 지금의 통치가 선대의 공로와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고 선대에 대해 존숭의 마음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백성들 또한 그들의 조상에 대해 예를 다하도록 하는 모범이기도 하다. 종묘의 ‘종(宗)’은 사전적으로 근본, 으뜸, 존숭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설문해자』에서도 존귀하다는 것으로 풀었다. 태묘(太廟)라고도 부르는 종묘는 그야말로 제사를 지내는 시설인 묘(廟)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묘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부계중심의 사회질서와 국왕이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제사는 하나의 권리이기도 하다.

형태적으로 종묘는 단순하고 장쾌한 건축물이다. 조상신에 대한 제사라는 단일한 기능을 담고 있으며, 19개의 신실은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어 있다. 넓은 월대 위에 놓인 좌우로 긴 건물. 이렇게 단순한 설명이 가능한 것이 종묘의 물리적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묘의 건축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 단순함과 장쾌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형태적 단순함과는 반대로, 종묘의 건축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난해한 학술적 용어가 동원된 역사학적 이해를 요구받게 된다. 19칸이나 되는 긴 건물이 만들어진 것은 왜인지, 왜 종묘의 정전 말고도 영녕전이라는 별도의 시설이 있는지, 정전과 영녕전의 모습이 갖고 있는 차이는 무엇인지, 임금이 아니었던 인물들이 모셔져 있는 것과 임금이었던 인물들 중에 종묘에 없는 경우는 왜 그런지.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 수반되지 않으면 종묘의 건축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단순함으로밖에 남지 않는다.

이것은 종묘가 이론적인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종묘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기 위해 성립된 이론적인 건축이다. 종묘가 예에 어긋나게 만들어졌다면 종묘의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과 같다. 종묘의 건립은 예의 구현에 그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때문에 종묘에는 수많은 학술용어가 붙어 있다.

조선의 종묘는 동당이실(同堂異室)의 건축물에 서상(西上)의 제도를 따라 신위를 배열한 경우에 속한다. 태조를 시조묘로 하고 4대의 신위를 봉사하며 별도로 불천위를 두었다. 정전과는 별도로 영녕전(永寧殿)이라는 별묘를 두었다. 이러한 설명은 모두 종묘의 이론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들 개념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묘제도의 역사적 전개와 조선시대 역사의 전반적인 개괄이 필요하다. 실제로 이러한 제도적 속성은 단번에 결정된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복잡한 논의를 동반하였다.

대부분의 유교적 담론이 그러하듯, 종묘의 제도도 고대 중국의 문명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동아시아 종묘의 모델은 주(周)의 그것이며,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를 두는 것이 원칙적인 제도였다. 조선의 경우 제후국으로서 5묘, 즉 시조묘와 당대 군주의 4대조를 모시는 것을 제도로 삼았다. 건축적으로는 후한대 명제(明帝) 이래로 전통이 되었던 동당이실의 제도를 택하였다. 또 신위의 배열에 있어서는 서상의 제도를 따랐는데, 이는 고래의 소목제(昭穆制), 즉 시조의 신위를 중앙에 놓고 2대, 4대의 소위(昭位)와 1대, 3대의 목위(穆位)를 좌우로 나누어 배열하는 방식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조선의 종묘 정전은 애초에 7칸의 실을 갖는 단일한 건물로 만들어졌다. 5개의 실은 석실石室이라 하여 시조와 4대조의 신위를 모시는 5묘로서 기능하였고, 나머지 두 개의 실은 협실로 인식하였다.

건축의 형태가 마련되었다고 하여 종묘에 관련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시조가 누구인가도 문제였고 시조묘 외에 모시는 4개의 신위도 어려운 결정이었다. 4대조를 모실 것인가, 4대의 선왕을 모실 것인가는 세차(歲次)와 위차(位次) 중 어느 것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공정대왕(정종)과 태종의 관계처럼, 동항렬의 군주인 경우 왕위에 따라 각각 1대로 계산한다면 위차로, 혈연에 따라 동일한 대로 계산한다면 세차로 기준을 삼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에는 세차 중심으로 종묘의 제도를 운영하였다. 이 경우 공정대왕과 태종을 물리적으로 각각의 신실에 모실지, 아니면 하나의 신실에 함께 모실지도 논의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종묘는 세차를 기준으로 하되 동일 항렬의 여러 군주가 있는 경우에는 각각의 신실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다만 이는 단순한 문제로 끝나지 않고 종묘의 물리적 공간의 부족을 야기하는 문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하였다.

조선의 종묘는 특징적이다. 단순하지만 힘이 있으며, 그 속에는 동아시아의 철학적 논의가 개입되어 있다. 종묘의 건축을 읽어내는 것은 답사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이론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종묘의 건축이 매력적인 것은 그 속에서 조선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축물에는 그 나름의 역사가 녹아 있지만, 단언컨대 종묘만큼 조선의 역사와 사상적 흐름을 보여주는 건축물은 없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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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경국대전』
  • 『대전회통』
  • 『국조오례의』
  • 『국조속오례의』
  • 『춘관통고』
  • 『대한예전』
  • 『종묘의궤』
  • 『종묘의궤속록』
  • 『영녕전수개도감의궤』
  • 『종묘개수도감의궤』
  •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
  • 『종묘수개등록』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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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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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기철, 2001, 「唐,宋,高麗,朝鮮의 종묘친협향의와 建築形式 比較 硏究」, 대한건축학회눈문집(계획계), 17권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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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기철, 2003, 「현종 4년 永寧殿 修改 논의의 전개」,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19권 9호
  • 정기철, 2006, 「永寧殿 重建 논쟁」,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22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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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상순, 2011, 「창건과 수리, 조선시대 종묘의 건축적 고찰」, 서울학연구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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