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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지금, 이곳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 모습!
즉 그 시대에 유행하는 삶의 모습과 습관 등을 우리는 풍속이라고 하는데요. 사진도, 영상도 없던 시절의 풍속은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요? 당시 화가들이 남긴 그림 속에 답이 있는데요. 풍속화의 세계로 떠나볼까요?

풍속화 유행의 시작점은 사대부 화가였다?

풍속화의 기원은 시간을 거슬러 선사시대로 올라가는데요. 다양한 짐승과 사냥 등을 바위에 새긴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 벽화에서도 당시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요. 주로 행차나 사냥에 관한 것이었죠.

조선 전기에는 왕이 백성의 삶을 살피거나 유교의 교리를 가르치고자 풍속 장면을 그렸는데요. 하나의 회화 장르로써 풍속화가 유행한 시기는 조선 후기로, 당대 풍속을 담았다고 하여 속화로 불렸습니다.

속화는 정조 이후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이 치르는 시험 주제로 자주 출제됐는데요. 그만큼 궁중 수요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풍속화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으로, 조선 후기 풍속화에는 당시 서민과 양반의 일상생활이 주로 담겼는데요. 풍속화 유행의 시작을 이끈 것은 바로 사대부 화가들이었습니다.

문인 출신인 윤두서는 서민의 노동하는 모습을 화면 중심에 부각해서 그리고 있는데요. 마치 산수인물화의 수려한 배경을 그려 놓고 주인공만 평범한 서민으로 바꾼 것 같죠?

또 조영석은 숙종의 어진을 모사해 달라는 영조의 부탁은 거절했으면서도 백성의 일상은 즐겨 그린 사대부 화가인데요.

두 화가는 서민의 일상을 관찰해 그리면서도 지배층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상적인 노동과 삶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이 같은 풍속화의 화풍은 김홍도와 신윤복이 등장하면서 크게 바뀌게 되는데요.

다리 아래 물새는 나귀 발굽소리에 놀라서 날고 나귀는 물새가 날아오르자 놀라고 사람은 나귀가 놀라자 놀란다. 이런 상황을 그리다니, 입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 강세황 / 김홍도의 스승

김홍도는 어떤 목적이나 이상이 아닌, 일상 속에서의 우습고 재미난 장면을 포착해 화폭에 담아내는데 능수능란했습니다. 그 솜씨에 스승 강세황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모든 사람들이 껄껄거리며 웃을 수 있는 그림을 그려라.

-『내각일력』 정조 13년(1789) 6월 13일

당시 정조도 모두가 껄껄껄 웃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하고 있듯이, 풍속화 자체를 감상하고 즐기는 문화가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실제로 단원 풍속화의 특징은 비록 힘든 노동의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 속의 미묘한 순간이나 우스꽝스러운 찰나를 포착하여 리듬감 있고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인데요.

김홍도의 화권을 펼치기만 하면 부녀자와 어린 아이도 모두 턱이 빠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니 고금의 화가 중에 없었던 일이다.

- 서유구 『임원경제지』

그의 그림에 담긴 해학과 풍자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또 혜원 신윤복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을, 그것도 기생을 풍속화의 주인공으로 과감히 선택했는데요. 양반의 유흥과 남녀의 밀회를 은밀하고 세련되게 화폭에 담아 조선 사회에 파격을 던져주었습니다.

“왕권이 약화되는 순조 시절을 맞으면서 방만해진 사회 모습을 잘 담아낸 화가가 혜원 신윤복이죠.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일탈의 모습들과 함께 (기생과) 양반층의 놀이를 여성 취향에 맞게 색깔을 아주 섬세하게 그리고 있고 최고의 그림을 묘사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태호 초빙교수 /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19세기 말에는 개항과 함께 외국인을 위한 풍속화가 그려지기 시작하는데요. 당시 인기 있었던 화가는 기산 김준근으로 외국인이 궁금해할만한 혼례나 장례, 형벌, 과거시험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공중위생시설조차도 아주 비싸게 구매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 에밀리 조지아나 켐프 /
『만주, 한국 그리고 러시안 투르키스탄의 모습
(The Face of Manchuria, Korea and Russian Turkestan)』, 1910(1464)

당시 외국인에게는 조선 사회의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었는데요. 대문 안의 생활을 엿보기에 풍속화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죠.

풍속화를 보면 당시 사회 모습이 보인다?

조선 후기 하나의 화풍으로 자리 잡으며 전성기를 누렸던 풍속화!
당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경제력을 갖춘 중인 및 서민 계층이 등장했고 서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예술적으로 승화된 것인데요. 비단 조선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서양미술사에서도 17, 18세기를 통해서 풍속화들이 등장하고 중국 명·청 시기에, 일본의 애도시대에 풍속화 혹은 춘화들이 크게 발달하죠. 그런 변화와 함께 조선시대에도 인간의 삶이 예술의 대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는 것을 이제 풍속화가 보여주는 거죠.”

이태호 초빙교수 /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풍속화에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물론 생활 모습까지 담겨 있는데요. 조선 후기의 사회 모습을 풍속화로 만나볼까요?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농업뿐 아니라 어업과 수공업, 상업 등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 등장하는데요. 대장간 그림에는 어린 견습생부터 숙련된 장인까지 역할을 나눠 분업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요.

조선 후기 인기 있는 기호품이었던 담배 만드는 과정도 등장하는데요. 담뱃잎을 말려서 곱게 써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여름의 고된 작업에도 담배 농사가 풍년인지 다들 표정이 좋죠?

또 삼현육각의 연주와 무동의 공연이 민간에 널리 유행했다고 하는데요. 삼현육각은 전통음악의 악기 편성법 중 하나로 향피리와 대금, 해금, 장구, 북으로 구성되며 당시 민간의 잔치와 공연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자리를 짜는 아버지는 머리에 쓴 모자로 보아 양반 같은데요. 조선 후기에는 몰락한 양반이 노동을 하기도 했지만 자식 교육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면 부유한 중인이나 양반을 중심으로 소비와 유흥문화가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당시 유행했던 한강 뱃놀이를 포착한 그림!
큰 배에는 악공과 기생까지 동반하고, 상중인 듯 흰 띠까지 두르고 나온 선비를 보니 사치 풍조가 만연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내들이 서서 술을 마시는, 전형적인 선술집 풍경도 등장하는데요. 금주령을 해제한 정조 대에는 한양 도심에 술집과 기방이 증가했으며 술집에서는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피지배계층의 생활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풍속화가 19세기에는 민화에 영향을 미치고 20세기, 21세기 와서는 대중문화하고 연결이 됩니다. 소위 말하는 밑으로부터 변혁의 시그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조선 후기 풍속화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병모 교수 / 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이렇듯 풍속화는 조선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모습을 포착해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풍속화, 즉 속화는 정조대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이 치르는 시험 과목 중 하나였다.
2. 조선 후기 풍속화는 김홍도신윤복이 등장하면서 유행의 정점에 이르렀다.
3. 19세기 말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외국인을 위한 풍속화가 많이 그려졌다.

해설

풍속화는 조선 후기에 태동한 화목으로서 당시 서민과 양반의 일상을 그린 그림이다. 일상을 담은 이미지는 청동기시대 암벽화에서부터 고구려의 고분벽화, 현대의 광고나 사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말 조선에서는 특별히 이러한 일상의 풍속을 그린 그림을 ‘속화(俗畵)’라고 지칭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인물화가 이전에는 중국의 옛 고사나 문학적 소재를 주제로 하였던 데 비해서 ‘속화’는 당대 조선의 도시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담았다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유행한 ‘속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그림을 우리는 현재 ‘풍속화’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의 일상을 반영한 풍속화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이지만 서민의 일상과 생업을 그린 그림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중국과 조선의 군주들은 일찍이 백성의 고달픔을 잊지 않기 위해 이를 그림으로 그려서 곁에 두고 보았다. ‘빈풍도(豳風圖)’, ‘무일도(無逸圖)’, ‘경직도(耕織圖)’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들은 그 유래는 다르지만 백성들이 농사짓고 길쌈하는 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풍속화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의 풍속화는 군주에게 백성의 모습을 살펴서 통치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감계적 기능에서 출발하였다.

17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당대의 풍속을 담은 ‘속화’라는 화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이 화제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화가는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조영석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사대부로서 그림에 깊은 관심과 재능을 가졌다. 윤두서는 전통적인 고사인물화의 배경 속에 조선 복식의 서민이 노동하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가 이처럼 실제 서민의 노동에 관심을 가진 데에는 새로운 기술을 조선에 적용하여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던 실학적 관심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숙종의 초상화 제작을 감독할 정도로 인물화에 탁원한 재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회화적 재능이 사대부로서의 위신을 손상할 것을 걱정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늘 주변을 사생하며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풍속화는 일상 속 서민들을 관찰하고 그대로 옮긴 사생화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풍속화는 대중적인 관심을 받으며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무역이나 상업으로 부를 일군 신흥 부유층의 문화 소비는 풍속화의 유행을 가속화 시켰다. 김홍도와 신윤복(申潤福, 1758~?)은 이 시기 풍속화의 절정을 이끈 대표적인 화가이다. 김홍도가 서민의 일상을 그렸다면 신윤복의 풍속화는 양반의 유흥 생활을 그렸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서민의 생업을 담고 있는데 농경과 잠직에 국한되던 이전의 빈풍도, 경직도 등과 달리 다양한 수공업·상업의 현장과 대중화된 공연과 교육의 실상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기생과 양반의 유흥 장면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 역시 서울을 중심으로 번성한 화려한 기방문화와 유흥업의 현장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처럼 두 화가는 서민 문화와 양반 문화, 향촌 풍습과 도시 풍정 등 조선의 다양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재미와 웃음을 담음으로써 풍속화가 감계적 기능을 담은 그림에서 그 자체로 즐길만한 감상의 대상이 되는데 기여하였다.

풍속화는 19세기말, 국내인 뿐 아니라 외국인을 위해서 제작되기도 하였다. 김준근은 당시 개항 도시를 중심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풍속화를 제작하였다. 현재 주로 해외 박물관에 소장된 김준근 전칭 풍속화들은 1200여 점이 존재한다. 김준근을 비롯한 지방 화가들이 공방을 만들어 수출품으로 생산하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김준근의 풍속화는 이전에 포함되지 않았던 장례, 제례의 장면이나 형벌 장면도 포함되었다. 사실상 즐길만한 소재가 되지 않았던 이러한 장면들이 풍속화에 포함되게 된 것은 이들이 외국인의 민속학적 호기심을 자극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은 구성이 단순하고 감정이 배제되어 있는데, 경제적인 작품 생산과 효율적인 정보 전달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처럼 풍속화는 본래 백성의 일상을 살피는 군주의 위민의식에서 비롯되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그 자체로 재미와 감동을 주는 그림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개항 이후에는 외국인의 흥미를 끌면서 또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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