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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시대별로 간략히 서술되어 그 개념과 변천 과정, 성격 등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문화·예술이야기>는 한국사 속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주제별로 그 흐름과 변천 과정, 특징과 성격 등을 전문가의 해설을 기반으로 동영상 자료로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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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혹시 지어낸 이야기 아니냐고요? 모두 조선시대 있었던 실제 사건인데요.

길들인 코끼리가 (중략) 두 사람을 해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중략) (청하건대) 전라도의 섬으로 보내소서 -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 11월 5일

얼굴 모습이 특이한 신병을 데려왔으니 나와서 뵙게 하겠습니다. (중략) 일명 바다 귀신이라 하는데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5월 26일

그것도 국가의 공식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조선시대로 순간 이동 한 듯 실감나는 역사 기록!
오늘날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위대한 기록유산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임금도 볼 수 없던 기록물,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서술한 조선의 공식 국가기록입니다.

제주(濟州)의 병선 1척이 태풍에 침몰하였는데, 경차관(敬差官)을 호송하던 배였다. -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 10월 18일

내용적으로도 정치, 경제, 군사는 물론 지리, 음악, 자연재해 등 다양한 분야가 망라돼 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영조의 혼례식을 그린 반차도를 보면 왕의 가마 뒤로 ‘사관’이 보입니다. 각종 의례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왕의 곁에 머물렀던 사관은 왕과 신하의 모든 말과 행동을 기록했는데요. 이것을 ‘사초’라고 합니다.

또 사관은 매일 기록한 사초를 기본으로 매년 시정기를 작성했는데요. 시정기는 여러 관청의 업무 일지와 사초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언제 편찬했을까요?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승하 이후에 ‘실록청’이라는 임시기관을 설치해서 만들었는데요.

수년에 걸쳐 완성된 조선왕조실록은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열람이나 수정을 할 수 없었으며, 편찬 과정에서 사용한 사초 등의 자료는 모두 세초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세초는 종이 문서를 물에 불려 짓이겨서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인데요.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지금 그 제자 김일손이 저술한 사초 내에 도리에 맞지 않는 말로 선왕대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고 또 그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 『연산군일기』 연산 4년(1498) 7월 17일

사초 중에서도 사관이 집에 보관했던 가장사초에는 임금이나 신하에 대한 평가가 담긴 ‘사론’이 수록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때문에 사초의 유출은 정치적 파장과 큰 화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연산군대 일어나 무오사화의 발단도 사초 내용에서 시작된 것으로, 완성된 조선왕조실록과 사초의 외부 유출을 차단하는 것은 사관의 직필 보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역사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그대로 공정하게 기록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공정한 집필을 보장하기 위해서 사초를 왕이나 또 고위 관리들 누구도 볼 수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를 했고요. 조선왕조실록 역시도 열람할 수 없도록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관들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또 소신껏 역사를 기록할 수 있도록 보장을 하였습니다.” 강문식 교수 / 숭실대학교 사학과

사관의 사초는 임금의 잘잘못과 재상들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과 지금 정치의 아름다운 것과 악한 것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 5월 17일

드물지만, 이전 사례를 반드시 참고해야 할 경우 일부 열람이 허용되기도 했던 조선왕조실록. 이 과정에서 해당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수정실록’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원 실록과 수정실록을 함께 남겼는데요. 원 실록의 문제점과 수정실록의 정당성을 후세에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이 기록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왕과 신하들. 이는 집권층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바른 정치를 펴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 직필의 원칙을 지켜 기록하게 한 이유는 후대가 거짓 없는 역사를 거울삼아서 모범적인 통치를 펼쳐나가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후대를 위해 지키다

조선전기까지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 등 네 곳의 사고에 나눠 보관했던 조선왕조실록.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진격로에 있던 세 곳의 사고가 파괴되었고,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도 소실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을 중심으로 해서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태조의 어진이 두 가지를 어떻게 안전하게 대피시킬 것인가 이것을 논의하고 경기전 참봉이었던 오희길 등이 내장산 쪽으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고요. 이 소식을 들은 유생 안의와 손홍록 이 두 분이 자신들의 사비를 털어서 실록을 옮기는데 참여를 하게 되었고요.” 강문식 교수 / 숭실대학교 사학과

조선왕조실록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내장산으로 향했던 안의와 손홍록. 안의가 남긴 임계기사를 보면 눈, 비, 바람을 맞아가며 두 사람이 산 속에서 불침번을 선 날만 370일에 달합니다.

목숨처럼 지켜낸 전주사고본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이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4부를 추가 인쇄하여 제작하였고, 다시는 같은 화를 입지 않고자 험준한 산속이나 섬으로 외사고를 옮겨 봉안하게 됩니다. 즉 조선후기에는 춘추관을 비롯해 5개의 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관리했을까요? 실록궤에 넣어 보관한 조선왕조실록은 2-3년에 한 번씩 사고에서 꺼내 바람에 말리는 포쇄를 실시했습니다. 습기가 차고 벌레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하거나 꺼낼 때도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는데요. 형지안이 그것입니다. 장서 소장 상황은 물론 파견된 사관 등도 빠짐없이 기록돼 있는 형지안. 조선왕조실록의 관리가 엄격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시련의 근·현대사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온 조선왕조실록! 후대를 위해 남긴 열정의 산물이자 방대한 기록은 그렇게 전해지고 있는데요. 조선왕조실록은 동아시아의 여러 실록 중에서도 독보적인 기록물로 인정받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중국의 실록으로는 명나라 실록과 또 청나라의 실록이 전해지고 있는데요. 이 실록들은 황제가 볼 수 있었던 점에서 권력자들이 교체될 때마다 실록이 다시 쓰이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조선왕조실록이 더 가치가 있는 우수한 기록물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강문식 교수 / 숭실대학교 사학과

원문은 물론 한글로 번역된 조선왕조실록을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시대. 조선왕조실록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감동을 주는 조선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위대한 기록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2. 사초는 사관이 왕의 곁에 머물며 왕과 신하들의 과 행동을 기록한 것이다.
3. 임진왜란 당시 여러 사람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사고본이다.

해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태조(太祖)부터 철종(哲宗)까지 25대 472년(1392~1863)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으로 서술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정족산사고본을 기준으로 1,707권 1,187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연대기로,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사상·문화 등 각 분야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1973년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서거한 후 그 다음 왕대에 편찬되었으며, 실록청(實錄廳)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하여 편찬 사업을 주관하였다. 실록청에서는 선왕 대의 여러 국정 자료들을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했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자료가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官)와 시정기(時政記)였다. 사관은 항상 왕을 수행하면서 왕과 신하들의 국정 논의 내용 및 각종 활동을 기록하여 사초를 작성했으며, 이중 객관적 사실을 기록한 사초는 즉시 춘추관에 제출하였다. 춘추관에서는 사초와 각 관서의 업무 기록을 정리하여 매년 시정기를 작성했는데, 시정기는 실록 편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한편 사초 중에는 사관이 자신의 집에서 보관하는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국정에 대한 사관의 평가, 즉 사론(史論)이 수록된 경우가 많았다. 가장사초는 실록 편찬이 시작되면 실록청에 제출되어 편찬 자료로 이용되었다.

역사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고 그 잘잘못을 사심 없이 평가하는 ‘공정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관의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 있게 ‘직필(直筆)’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에서는 사관의 직필 보장을 위해 사관이 작성한 사초나 편찬이 완료된 실록의 열람이나 수정을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새로운 실록이 완성되면 실록 편찬의 총 책임자인 총재관(總裁官)이 실록 완성 사실을 국왕에게 보고한 뒤 곧바로 실록을 춘추관 사고와 외사고에 봉안하여 그 내용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 차단하였다. 또, 실록 편찬의 자료가 된 시정기와 사초, 실록의 초고들도 모두 세초(洗草)하여 없앰으로써 실록 내용의 유출을 억제하였다.

국정 운영 과정에서 이전의 사례를 참고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실록의 해당 내용을 열람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실록의 일부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고, 그중에서는 조선 후기 붕당들의 정치적 입장과 상충되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편찬이 완성된 실록은 아무리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고칠 수 없었다. 이에 조선 후기에는 기존 실록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 해당 실록을 새로 편찬하는 경우들이 나타났는데, 이를 수정실록이라고 한다. 수정실록의 편찬에서 주목할 것은 수정실록뿐만 아니라 원 실록도 함께 보관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은 원 실록이 남아 있어야 후대 사람들이 원 실록과 수정실록을 비교해 보고, 원 실록의 문제점과 수정실록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원 실록이 비록 내용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이 역시 국가에서 편찬한 실록이라는 점에서 존중하며 보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기록을 중시했던 선조들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서울의 춘추관 사고와 지방 외사고(外史庫)에 1부씩 보관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에 사고를 설치하고 4부의 실록을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왜군의 진격로에 있었던 성주, 충주, 춘추관 사고가 파괴되면서 실록도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사고의 실록만 유일하게 보존되었다.

왜군의 침입으로 전주사고본 실록 역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珖),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 등은 전주사고본 실록과 경기전의 태조 어진(御眞: 초상화)을 안전하게 보존할 방안을 논의한 끝에 실록과 어진을 내장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생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두 사람은 자원해서 자신들의 사재를 털어 실록 이관 작업에 동참하였다. 내장산으로 실록과 어진을 옮긴 안의와 손홍록은 1593년 7월 실록을 정부에 인계할 때까지 1년여 동안 매일 숙직을 하며 실록은 안전하게 지켜냈으며, 정부 인계 후에도 실록 보존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전주사고본 실록은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조선 정부는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4부의 실록을 추가 제작하여 총 5부를 갖추었다. 그리고 춘추관 사고를 제외한 지방 외사고를 험준한 산지나 섬으로 옮겨 설치하기로 했는데, 이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도시에 설치된 사고들이 화를 입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 이후 외사고는 강화,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에 설치되었다. 이 중 묘향산사고는 후금의 침입이 가시화되면서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으로 옮겨졌고, 강화사고는 현종 대에 강화 남부의 정족산으로 이전되었다. 한편 사고 건물 관리를 위해 사고 참봉(參奉)을 임명하여 관리 책임을 부여했고, 사고별로 수호사찰 배치하여 수호사찰 소속 승도들이 사고 건물을 수직(守直)하도록 했다. 각 사고의 수호사찰은 다음과 같다.

사고에서 실록은 ‘실록궤(實錄櫃)’에 넣어 보관하였다. 실록궤 하나에는 대략 15~20책 정도의 실록을 넣었으며, 실록궤 안의 방습(防濕)을 위해 기름종이와 천궁(川芎)·창포(菖蒲) 등의 약재를 사용하였다. 또, 실록궤는 자물쇠를 채우고 봉인(封印)하여 사고 관리자도 함부로 열지 못하고 오직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만 열 수 있도록 관리하였다.

한편, 실록궤에 보관된 실록은 일정 기간마다 궤 밖으로 꺼내어 바람에 말림으로써 습기를 제거하고 부식 및 충해를 방지했는데, 이와 같은 관리 방법을 포쇄(曝曬)라고 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2~3년에 1번씩 사관을 지방 사고에 파견하여 포쇄를 실시하였다.

또, 조선 정부는 새로운 실록의 봉안이나 기존 실록의 포쇄, 고출(考出: 과거 사례를 확인하기 위해 실록을 참고하는 일), 그리고 사고 건물 보수 등의 사유로 열 때마다 실록을 비롯한 사고 장서의 상황을 점검하여 기록했는데, 그 기록을 형지안(形止案)이라고 한다. 형지안에는 사고를 연 시기와 이유, 궤짝별 보관 서책의 종류와 수량, 파견된 사관과 실무자들의 명단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수많은 사고 형지안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선시대 사고 관리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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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항녕, 2009,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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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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