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국(辰國)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대표적인 두 견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후한서」를 근거로 하여 진을 삼한의 총왕인 진왕의 하나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다음으로, 진번을 진과 번의 결합체로 보고 진의 일부가 남하하여 한강 하류에 이르렀을 때 곧 진국이 되었고, 그 마지막 정착지인 경상도 일대에 이르러 진한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의 견해에 따르면 진왕의 치소였던 목지국을 직산으로 비정하고 그곳이 곧 진의 중심지로 보았으며, 이러한 이해가 그간 통설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앞선 삼국지의 기록에서는 진한만을 옛 진국이라 하여 이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점 등이 있어 근래에는 목지국을 예산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진국의 국가적 성격 및 사회 발전 단계에 대해서는 처음 부족 국가론이 제시되면서 목지국의 진왕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 연맹의 단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군장 사회설에서는 진국과 진왕의 관련을 부정하는 가운데 삼한을 군장 사회로 이해하는 기준에 따라 진국 역시 군장 사회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예나라의 왕 남여가 28만 명의 주민을 이끌고 중국 한나라에 투항하자 한은 그 지역을 창해군이라 하여 복속시키고 위만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위만 조 선과 흉노 간의 연결이 봉쇄되고 후에는 위만 조선을 멸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