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당전쟁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한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 행사를 꾀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였다. 669년 2월 4,000호를 거느리고 신라로 귀부한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에 봉하였고(뒤에 보덕국왕으로 고쳐 봉하였다.), 고염무와 검모잠이 이끌고 있던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였다. 한편 신라는 백제 지방에 군대를 출동시켜 부여융의 백제군과 당군을 각처에서 격파하고 사비성을 함락한 다음 이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당은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왕에 임명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 이에 신라는 황해의 방비를 강화하면서 북쪽으로 침입해 오는 당군과 9회나 싸워 2천여 명을 죽이고, 임진강과 한강 하류 등지에서도 당군을 대파하였다. 특히 675년(문무왕) 9월 당나라 장군 이근행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신라군이 이를 크게 격파하여 말 3만 380필과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은 매소성 전투의 참패를 해전에서 만회하고자 설인귀를 시켜 황해의 신라 해군을 공략하게 하였다. 676년 11월 설인귀가 이끄는 병선이 기벌포를 침범하자, 사찬 시득이 이끄는 신라 함선이 이를 맞아 싸웠다. 처음에는 신라 해군이 패하였으나, 이어 크고 작은 22번에 걸친 싸움 끝에 신라군은 당나라 해군 약 4,000명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이 싸움은 670~676년의 7년간에 걸쳐 벌인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마지막 대회전이었다.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분쇄하기 위한 신라와 고구려 · 백제 유민의 끈질긴 저항으로 신라는 당군을 몰아내고 대동강~원산만 이남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만주 지방을 상실한 불완전한 통일이기는 하지만, 삼국 분열을 극복하고 단일 민족 문화 성립의 기반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신라에 의한 통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처음에는 비록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맞서 고구려 · 백제의 유민과 합심하여 저항했다는 사실은 자주적인 통일의 의미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