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
 
  조선 시대에는 초기부터 새로운 통치 규범의 제정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한두 번의 법전 편찬이 있었고, 여러 차례의 법전 정비 과정을 거쳐서 세조조에 이르러 불변의 법전을 편찬하는 일이 착수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예, 형의 율령을 편집하는 일은 있었으나, 완전한 법전의 편찬은 없었다. 고려 말 공양왕 4년에 정몽주가 원의 지정조격과 명의 대명률을 참작하여 신정률을 편찬하였으나, 바로 이성계가 즉위하여 주목받지 못하였다. 태조 3년에는 정도전이 원의 경세대전과 명의 대명률을 참고하여 조선경국전을 찬술한 적이 있었으나, 이것 역시 개인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태조는 즉위 초에 의장 법제는 오로지 전조의 고사에 의한다고 포고하여 고려의 법제를 준용할 것을 표명하였으나, 실제로는 새로운 교령이 점차 늘어나고 신왕조의 기틀이 잡혀감에 따라 통치 규범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태조 6년 12월에는 우왕 때부터 당시까지 발표된 조례를 검상조례사에게 정리하게 하여, 이를 경제육전이라 하여 중외에 반포하였다. 그 후 태종 7년에는 다시 경제육전 반포 이후부터 그 때까지 나온 조례, 판지 등을 정리할 것을 속육전찬소에 명하여 태종 13년 2월에 경제육전을 수정한 원육전과 그 뒤를 이은 속육전이 찬술, 간행되었다.
  그 후 정국의 변화에 따라 현실과 맞지 않거나 운영상에 나타나는 모순을 해 결하고자 세종 4년에 다시 육전 수찬소를 설치하여 법전의 개찬에 착수하였다. 원 · 속육전이 다시 수찬되고 이와는 별도로 등록이 수찬되어, 항구성을 지닌 법과 일시적인 명령인 조례를 구분하는 법전 편찬의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 세조는 즉위 초에 양성지의 건의에 따라 육전 상정소를 설치하여 육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세조 6년에는 호전을 완성, 반포하고,다음 해에는 형전이 완성되었다. 이어 편찬 작업이 계속되어 예종 원년 9월에는 이, 예, 병, 공 4전 이 편찬되었다. 예종의 급서로 6전의 반포 준행은 지연되어, 성종 2년 정월을 기하여 모두 6전으로 된 경국대전을 반포, 시행하였다. 이후에도 중보, 교정할 곳이 있어 교정청을 설치하여 최종 수정판을 편찬, 반포하도록 하였다. 지금 전하고 있는 경국대전이 완성된 것은 성종 16년이다. 경국대전은 주례의 6전 형식에 따라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전으로 구성, 편찬되었다. 이전에는 경외의 문관을 위주로 한 잡직, 내료 등의 직제와 그 계수, 고과 등이, 호전에는 호적, 전제, 세제 등이, 예전에는 제례, 교육, 외교 등이, 병전에는 경외 무관의 직제와 병제, 병정 등이, 형전에는 형벌, 노비제 등이, 공전에는 토목, 영선, 공장 체제 등이 규정되었다.
  법은 백성과 더불어 그 공공성이 존중되어야 하고, 국왕일지라도 법을 사사로이 어겨서는 안 되며, 법은 가볍게 고칠 수 없는 천하 만세의 공법이어야 한다는 것이 경국대전 편찬의 기본 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