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자료]

1. 농경의 시작은 인구 증가 때문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원전 1만 년 전 오늘 날과 같은 기후가 되면서부터 인류의 문명은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를 신석기 시대라고 한다. 신석기 시대에는 수 십 만년 동안의 채집과 사냥 등으로 살던 구석기 시대와는 달리 날카로운 석기의 사용과 언어에 의한 협동 작업으로 농사를 지었고 가축도 기르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는 기간은 짧으나 문명의 변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됐기 때문에 신석기 혁명이라 한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농사를 시작한 것은 아마도 자연 환경의 변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구석기 시대가 끝나면서 지구의 온도는 점차 상승하였다.  기온이 따뜻해지니 살기는 이전보다 좋아져서 1천만 명 정도였던 세계인구가 500배 이상으로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자연환경이 좋아진 것이 인간에게 행복만을 선사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은 빙하가 녹으면서 육지가 침수되기 시작하였다. (신석기 직전 의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100m 이상 낮아져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또한, 빙하기에 적응하여 살던 덩치가 큰 동물들도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되거나, 자신들에게 맞는 기후를 찾아 떠나버렸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인류가 택한 방법이 농경이었던 것이다.


2. 농경의 시작으로 시작된 정착 생활

   농경 생활을 하기 이전 인류는 오랜 동안에 걸쳐 채집, 사냥, 고기잡이 등으로 그들의 식량을 조달하였다. 하지만 농경이 시작되면서 인류의 생활은 채집 경제에서 생산 경제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농사에 필요한 정교한 석기들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간석기(마제석기)와 나무로 된 연장 등이 제작 되었다. 이로써 정착 생활이 가능해졌으며, 또한 곡물을 보관하고 조리하기 위해 토기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또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물들에 대한 사육이 이루어 졌다. 이러한 정착 생활은 결국 문명의 발달을 촉진하게 되었다.



 3. 빗살무늬 토기의 빗살은 머리빗

   빗살무늬 토기의 빗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빛이 들어오는 모양을 새긴 토기’라는 설에서부터 ‘빗금 모양을 새긴 토기’라는 설까지 대부분은 그럴듯한 주장들이다. 하지만 빗살무늬토기는 한자로 ‘櫛文土器(즐문토기)’라고 쓴다. ‘櫛文(즐문)’이란 빗모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빗살무늬 토기는 머리빗으로 모양을 낸 듯한 문양이 새겨진 토기라는 뜻이다. 무늬는 조개껍데기나 생선뼈, 나무 새기개 등을 이용하여 새겨 넣었으며, 빗살무늬의 모양이 상징하는 것은 번개, 강물, 밭고랑 등이라고 한다. 토기의 문양은 토기에 신성한 힘을 불어넣는 상징적 표시 이른 민무늬토기를 제외하면 신석기시대의 토기에는 하나같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표적인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토기에 무늬를 새겨 넣은 것은 신성한 힘이 깃들기를 바라는 염원의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신성한 힘이 깃든 토기는 잘 깨지지 않고, 미끄럽지 않아 운반하기도 편했으며, 외관도 아름다워 보였을 것이다. 이때는 아마도 토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별도로 정해져 있었을 것이며, 성공적으로 잘 구워진 토기도 일부였을 것이다. 그 중 상당수는 불의 온도가 너무 강해서 굽다가 깨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불을 골고루 받지 못해 잘 구워지지 않은 토기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토기가 깨지지 않고, 잘 구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문양으로 새겨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기를 굽는 기술이 발달하는 신석기 시대 후반기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토기에서 문양은 사라지고 무늬 없는 토기가 대량으로 제작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토기에서 문양이 사라진다. 그 후 철기시대에 이르면 다시 문양이 새겨진 토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토기의 제 작과정에서 공기를 빼내기 위해 박자를 두드린 자국이거나 토기의 장식을 위해 아름다운 문양을 새기거나 아니면 사용기관의 문양을 새긴 것이다.         


 4. 연천 전곡리 유적이 중요한 이유?

   경기도 연천 일대가 중요한 것은 유적이 많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발견된 석기들이 인도 동쪽의 아시아에서는 거의 발견된 사례가 없는 특별한 형태의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1944년 미국의 모비우스라는 사람이 ‘주먹도끼’라 불리는 석기의 유무는 구석기 시대 문화권 설정의 지표가 된다는 주장을 제기했는데, 세계 구석기 고고학에서 통설로 통용되던 이 생각은 전곡리 유적의 발견과 더불어 무너지고 말았다. 임진강 유역은 이제 세계 구석기 지도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다.

    이 유적을 처음 발견한 이는 그렉 보웬이라고 하는 미 공군하사관이었다. 그는 인디애나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 학비를 벌기 위해 군에 입대, 동두천 미군 2사단 헬리콥터장 기상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연히도 그는 석기에 관심이 많았고, 자케타 보르다즈라는 석기 전공교수로부터 많은 지식을 쌓은 처지였다. 1977년 한국에 온 그는 미군 영내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던 한 젊은 여성과 사귀었는데, 결혼을 약속한 이들은 78년 1월 20일 한탄강유원지로 같이 놀러갔다. 지금은 한탄강 유원지가 공장폐수와 음식점으로 엉망이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이곳은 한적하고 깨끗하며 조용히 데이트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었다. 아무튼 강변을 산책하던 그는 우연히도 강가의 모래둔덕이 길을 내느라 잘려나간 곳에서 토기편과 숯이 된 목재가 노출된 것을 발견하게 됐다. 1년여 만에 고고학 유적을 접하게 된 그는 매우 흥분하여 그 일대를 좀더 조사해보고자 영문도 모르는 애인을 무조건 뒤를 따라오게만 하고 주변을 찾기 시작했다.

    한시간이 넘도록 별 소득도 없고 추운 날씨에 짜증을 내기 시작한 애인도 있고 해서, 요기나 하자고 생각한 그는 애인과 함께 앉을 만한 곳을 찾았는데, 마침 조금 떨어진 곳에 잔디가 잘 깔린 묘역이 있어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배낭을 내려놓고 물끓일 차비를 하던 그에게 갑자기 주먹도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얼어버릴 것만 같은 충격에 그는 들고 있던 것을 내팽개치고 그것을 집어들고는 어리둥절한 애인에게 “봐! 봐! 내가 뭘 찾았는지 좀 보라구!” 하는 소리를 정신없이 외치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주위를 계속 찾던 그는 주먹도끼 3점, 가로날도끼 2점과 긁개 1점을 발견했다. 전곡리 유적이 드디어 길고도 긴잠에서 깨어난 순간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에 그는 바로 귀대해 사진기를 빌리고 군용작전지도를 한부 구한 다음, 다시 현장으로 뛰어왔다. 정확한 발견지점을 지도에 표시하고 현장과 유물 사진을 찍은 그는 1주일여에 걸쳐 막사에서 자세한 보고문을 작성했다. 그런데 흥분 속에서 자료는 정리했지만, 이 중요한 발견을 누구에게 알려야 할지 몰라 막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 고고학자가 있는지, 또 있다면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를 애인과 부대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에게 물어봤으나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프랑스 보르도대학의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프랑소아 보르드 교수에게 무조건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보르드 교수는 발견의 중요성을 즉각 인지하고 바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냈다. 즉 “만약 이것들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됐다면 나는 이것을 의심없는 아슐리안 문화(유럽,아프리카,중동,인도에 걸쳐 발견된 전기 구석기 시대의 한 시기 이름이자 문화 이름. 특히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라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양면가공석기가 중요한 지표유물이다. 가장 오래된 아슐리안 유적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1백4,50만년전의 유적이고, 대체로 8-10만년전 사이에 다른 문화로 대체됐다.) 의 석기라고 부르겠습니다. 내 자신 직접 현장을 보고 싶은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러나 여건상 그럴 수 없으니, 한국에 있는 학자들을 접촉하십시오. 여러해 전 서울대학교에서 유학생을 보낸 적이 있으니, 서울대학교에 연락해 보십시오”라고 써 보냈던 것이다.

    보웬이 보낸 편지가 서울대 고고학과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3월 중순이었다. 4월15일 휴가를 받은 그는 서울대로 찾아왔고, 필자의 길안내로 당시 서울대가 발굴하고 있던 여주 흔암리 청동기 시대 집자리 유적에서 김원룡 교수를 만나게 됐다. 한국사람으로 전곡리 유물을 처음 본 셈인 필자는 당시 4학년 휴학생이었는데, 어린 눈에는 그가 주섬주섬 배낭에서 꺼낸 돌덩이들이 책에서 그림으로 보던 것과 비슷해 신기하다는 생각만이 들었을 뿐,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김교수께서는 매우 흥분하셨고, 이 유적을 바로 보고 싶다는 욕심에 허겁지겁 서울로 올라가셨다. 필자는 보웬과 현장에서 더듬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사흘을 같이 지내는 동안 가까운 사이가 됐는데, 유적 발견에 얽힌 얘기를 장황히 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때 그에게서 자세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전곡리에서 발굴이 시작된 것은 그해 11월 발견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지 넉달이 지난 79년 3월이었다. 귀국후 보웬은 아리조나 대학에서 고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발굴전문회사에 취직해 한국인 아내와 자식들과 같이 잘 살고 있다. [출처 : 이선복교수의 고고학이야기(pp200-2)]

 


 그림자료

뗀석기 제작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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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개와 찌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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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인들의 채집과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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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설명

가락바퀴에 막대를 움직이지 않게 끼고 한 손에 섬유 또는 꼬임을 주려는 실을 잡는다. 다른 한 손으로는 실 끝을 잡아늘여 막대에 잡아매고 가락바퀴를 늘어뜨려 일정한 길이로 실이 뽑히도록 자세를 잡고, 가락바퀴를 회전시키면 실이 늘어뜨려지는 순간 꼬인다.


자료 출처 한국생활사 박물관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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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석기 제작 방법


 그림자료

자료 설명

대개 둥글거나 혹은 이에 가까운 네모진 모양으로 땅을 파고, 둘레에 기둥을 세워 비바람을 막기 위한 이엉을 덮어 만든 것이었다. 크기는 직경이 6m 정도, 깊이는 60cm 정도. 한가운데 화덕자리가 있음(취사장의 구실)

신석기 시대의 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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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