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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회 鄕會

조선 시대 지방에 거주하는 사족이 중심이 되어 운영한 지방자치회의.
사족이 향안을 기반으로 향촌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구성하여 운영하였다. 그 구조는 유향소 조직을 이용하는 형태, 유향소 조직 위에 따로 상부구조를 갖춘 형태의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회의는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개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구성원은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람으로 제한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그 지역 사족 모두 포함되는 곳도 있었으나, 역시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람이 중심이 되었다.
향촌 내의 모든 일을 지휘 감독하였는데, 주로 향안에 이름이 기재될 사람을 결정하고, 향임을 추천하여 임명하고,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적발하여 향소나 백성으로 하여금 처벌하도록 하는 한편, 선행자를 포상하기도 하였다.
입의·약속·향규 등으로 표현된 각종 규제조항을 마련하였는데, 그 내용은 사족을 결속시키고 향리와 백성을 지배하며 부역체제 등 향촌 내의 여러 가지 일에 관련되는 것이었다. 사족의 계급적 이익을 관철시키는 향촌지배층의 통치기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8세기 중엽 이후 지방관의 주도로 향촌사회 권력구조가 수령과 이향(吏鄕)을 중심으로 재편된 것과 짝하여 그 성격이 수령의 부세자문기구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경제력을 갖춘 부민층의 비중이 커지고, 부세운영을 둘러싼 계층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피지배층의 성장에 따라 일부 평민들까지 참여하였고, 그 성격도 기층사회의 성장한 힘이 안으로 결집되어 형성된 자치조직으로 변하였다. 이 시기에는 유향들만이 참여하는 것, 향임 ·향리와 면임(面任 ·이임(里任)·두민(頭民) 등 지방행정의 말단 책임자들이 참여하는 것, 대소민제회(大小民齊會)라 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민 모두 참여하는 것 등 다양한 유형이 있었다.
특히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요호(饒戶)들이 향임 ·면임 등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들은 향회를 통하여 삼정 등의 부담을 주로 떠맡기도 하였으나, 자신들의 의사를 결집하고 나아가 관권에 대한 저항운동의 발판을 여기에서 마련하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 농민 항쟁기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민 모두가 참여하는‘도회(都會)’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향촌의 공론을 주도하고 초군을 동원하는 등 저항조직으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새로 마련된 조세제도를 담당할 지방기구로서 법제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1907년 5월 통감부에서 향회를 폐지하고 재무서의 자문기구로 지방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향회가 여전히 남아 있는 곳도 많았으며, 근대적인 형태로 발전하여 민회(民會) ·민의소 등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2. 동족 마을

혈연 관계가 있는 동성(同姓)의 가호(家戶)들이 모여서 이룬 마을. 동성마을이라고도 한다. 한국과 중국에서 일찍부터 성립되어 온 취락 형성의 한 형태로, 일본의 일부 지방에서도 유사한 예를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동족마을 형성의 역사는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한층 발전한 것은 조선 시대였다. 당시의 동족마을 중에는 군현의 수령의 통제를 받지 않고 그 자체의 운영 조직인 ‘사구회(社構會)’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던 것도 있었다. 1930년도 조사에서는 전국에 1만 5000여 개의 동족마을이 확인되었고, 이 중에는 지방의 호족·사족 및 퇴관한 고급 관인에 의해 세워진 저명 동족마을 1,700여 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족마을은 지방 세력자의 자손, 사전에 은퇴 ·정주한 중앙 관직자의 자손 및 남부 지방으로부터 북부 지방으로 이주한 개척자의 자손 등이 대대로 그곳에 눌러살면서 분가(分家)를 거듭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그 존립에는 유교적인 생활 관습이 크게 작용하였다.
즉, 유교적인 조상 숭배의 사상에 바탕을 둔 선조의 묘지 수호, 제사의식 존중의 생활 관습이 종가를 중심으로 한 동족마을 형성의 주된 요인이 되었고, 그 밖에 문중 재산의 공동 이용, 영농에서의 상호협동, 관혼상제 기타 생활면에서의 상호부조 등 경제적인 협동 및 선조의 관직 ·사회적 지위 등을 계승한 문벌이 사회 활동의 기반이었던 유교적인 봉건 사회의 풍토 등이 동족마을의 존립에 크게 작용하였다.
동족마을은 봉건적인 사회 체제의 붕괴,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 6·25전쟁 때의 전출입 인구의 증가 및 근래 국가 경제의 발전에 따른 도시의 인구 흡인력 증대와 도시화의 추세 등으로 인해 점차 와해되어 가고 있으나, 지금도 전국적으로 동족마을의 형태와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많다.

 


3. 서원

서원(書院)은 조선 시대의 사립 교육 기관이다. 선현을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서원은 유학의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 또는 사묘의 역할, 향약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는 역할, 단순한 교육이 아닌 학문 연구와 발전의 기능을 하는 연구소 역할을 담당했다. 1865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서원과 사우 1000여 곳을 헐어 버리고 47개소만 남겼으며, 서원의 전결(田結)을 거두어 공전에 귀속시켰다.

 


4. 사우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영정을 모셔 두고 연 수차에 걸쳐 제향을 행하는 장소. 명칭은 곳에 따라 향현사(鄕賢祠향사(鄕祠)·이사(里祠)·영당(影堂)·별묘(別廟)·세덕사(世德祠)·유애사(遺愛祠)·생사당(生祠堂)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5. 공명첩

실직은 주지 않고 명목상으로만 벼슬을 주던 임명장이다. 여기에는 관직·관작의 임명장인 공명고신첩, 양역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면역첩, 천인에게 천역을 면제하고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면천첩, 향리에게 역을 면제해주는 공명면향첩 등이 있다. 나라의 재정이 곤란할 때, 관청에서 돈이나 곡식 등을 받고 부유층에게 관직을 팔 때 관직명 ·성명을 기입하여 발급하던, 일종의 매관직첩(賣官職帖)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임명된 사람은 실무는 보지 않고 명색만을 행세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국가재정이 탕진된 데다 당쟁의 폐해로 국가기강이 문란하였고, 또 흉년이 자주 들어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나라에서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명예직을 주고 그 대가로 많은 재정을 확보하게 한 것이었다. 즉, 이 제도는 임진왜란중에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공을 세우거나 납속한 자에게 발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후 복구와 흉년의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서 계속 실시했다. 특히 현종대에는 곡식을 거두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명첩을 발급하였다. 이때부터는 공명첩의 가격이 더욱 싸졌을 뿐 아니라 평민층·천민층에게 주어지던 벼슬의 제한도 대폭 완화되었다. 특히 숙종년간에도 여러 차례 발행하였는데, 1690년(숙종 16)의 경우 각종 공명첩 2만 장을 8도 전역에 나눠주어 팔게 할 정도였다.

당시 진휼청에서 가설첩을 만들어 매매하였는데, 이 매매로 얻은 돈은 영남지방의 기민들의 구제에 쓰였다. 이 밖에 영조 때 공명첩을 여러 번 발행하여 백성을 구제하였고, 순조 때에도 김재찬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공명첩을 발행하였다.

또한 절을 크게 짓기 위하여 그 비용을 부담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하급무직의 공명첩을 주었다. 1793년(정조 17) 유점사에 100장을 주어 영산전을 지었고, 1851년(철종 2) 법주사에 400장, 1879년(고종 16)에는 귀주사에 500장을 주었다.

공명첩의 발급은 재정이 궁핍했던 조선정부가 신분이 엄격한 양반사회에서 양반이 되기를 갈망하는 농민들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공명첩에는 받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공으로 받은 것인지 기록해놓지도 않았으며, 특히 관직과 산계(散階)를 주는 공명고신첩의 경우 실제의 관직을 주는 것이 아니라 허직일 뿐이었다. 이 공명첩은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명첩을 사는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공명첩에 명시된 직위를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 되며, 이를 점차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신분·호구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존재한 호적대장 등에 납속가선이니 납속통정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납속'의 문구는 붙이지도 않고 가선이니 통정이니 하는 직함만 표시하여 사실상 납속이란 단서를 없애버렸다. 이에 정부는 그러한 위법행위를 하는 자를 무거운 죄로 다스릴 것을 규정하였지만, 지방 말단관리들의 운영 문란으로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납속수직자라 하더라도 실직자(實職者)나 마찬가지로 양반 행세를 하게 되었다.

 


6. 납속책

조선시대 군량 등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거나 또는 흉년 ·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목적으로 백성에게서 곡물과 돈을 받고 국가가 납속에 응한 자에게 일정한 특전을 부여한 정책이다. 특전의 종류에 따라 노비 신분을 해방시키는 납속면천, 양인에게 군역 의무를 면제해주는 납속면역, 양인 이상을 대상으로 품계, 특히 양반의 경우 실제의 관직까지 제수하는 납속수직 등이 있다. 이같은 특전부여의 문서로 면천첩(免賤帖) ·면역첩 외에도 교생이 강경시험에서 떨어지면 군역에 나가게 되므로 강경을 면제해주는 교생면강첩, 향리역을 면제해주는 면향첩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품계와 관직을 기록한 관리임명서로 이를 받는 자의 이름 쓰는 난을 비워두는 공명고신첩이 있고, 여기에는 훈도첩·노직당상첩·추증첩·증통정첩·가설실직첩, 그리고 서얼에게 벼슬에 나가는 것을 허용하는 서얼허통첩 등이 발행되었다.

납속은 예종 1년(1469) 황해도와 강원도의 절도사가 한명회에게 납속환염(納粟換鹽)을 청한 일이 있다. 그리고 1480년(성종 11) 서거정이 의 제도를 본따 납속보관할 것을 건의했고, 경기관찰사 손순효도 이의 시행을 건의함에 따라 1485년에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강원도·영안도(평안도) 등에서 실시되었으나 그 대상은 노비에게만 국한되었고, 그 액수도 후기에 비해 상당히 많은 액수였고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납속이 제도화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를 모으는 과정에서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궁궐 ·성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재정과 물량을 확보하려고 계속 실시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호조에서 작성·실시한 납속사목에 따르면, 향리의 경우 30석을 바치면 면역되어 참하영직을, 80석을 바치면 동반의 실직(實職)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서얼의 경우 5석만 바쳐도 겸사복(국왕의 친위군)과 우림위(금군의 하나) 또는 6품의 서반군직을, 50석이면 5품 영직, 60석이면 동반 9품, 80석이면 동반 8품, 100석이면 동반 6품을 받을 수 있었다. 서얼과 향리층은 양반사회의 자기도태 작용으로 밀려난 계층이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납속책을 통해 신분상승의 길이 열렸다. 이를 통한 신분상승은 서얼과 향리에 한정되지 않고, 천인의 경우에도 재력만 있으면 일단 속량했다가 다시 양반으로 오를 수 있었다. 특히 정부가 재정적으로 곤란에 빠질 때마다 강제로 발매한 공명첩은 재력 있는 비양반층이 양반신분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이렇게 납속이 대규모로 그리고 자주 시행됨으로써 시대가 갈수록 납속으로 제수되는 위계품직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또한 납속에 따른 특전부여가 단지 명목상에 그쳤기 때문에 그만큼 직첩의 값도 떨어졌다. 숙종 ·경종 연간에는 공명첩의 남발과 강제 매매성 때문에 국가가 백성을 속이는 처사라는 비난도 있어 잠시 정돈되기도 했지만, 이후 사찰 ·서원 등의 중건과 복구, 무기제작과 산성 복구의 명목으로 공명첩의 발매 목적이 확산되고 노비종량도 더욱 활발해졌다.

영조 때 편찬된《속대전》에 따르면 사노비의 종량가가 1백 냥, 즉 쌀 13석으로 법제화될 정도였다. 이 제도는 순조 이래 세도정권에 의한 매관매직의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재정 보완이라는 본래의 목적이 흐려지고, 점차 신분상승의 기회로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은 납속책으로 획득한 명예적 지위를 실제의 양반 지위로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이들은 군역을 지는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 결국 납속은 양정(良丁)의 심각한 부족현상을 가져와 군정 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국가체제의 유지를 목적으로 시행된 이 제도는 시대가 갈수록 오히려 봉건적 신분제의 동요에 영향을 미쳐 조선왕조를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