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자료

 

 

1. 삼정 三政

 

조선 후기 국가 재정의 주종을 이루었던 3가지 수취행정. 전정·군정·환정을 통칭하며, 그 행정에서의 파탄상을 <삼정의 문란>이라고 한다.
전정은 세종 때 제정된 전분육등제·연분구등제에 준거한 전세의 부과·징수를 근간으로 하며, 그 성패는 양전과 연분의 정확하고도 공정한 시행 여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양전 자체가 규정대로 실시되지 않았고, 연분도 수령과 토호 및 경차관(敬差官)들의 작간(作奸)으로 말미암아 온갖 물의를 빚어냈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토가 황폐화하여 경작지가 크게 감소하였는데도 궁방전을 비롯한 각종 면세전이 증대되는 한편 삼수미·대동미·결작 등이 새로 전토에 부과, 징수됨으로써, 19세기 중엽 철종 때에 이르러서는 전정의 폐해가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수세 결수가 양안 결수의 반에 불과한 데도 일부 수령과 아전들의 은결은 날로 늘어났고, 아전들은 세금을 징수할 때 도결(都結)·방결(防結) 등의 수단으로 실제 세액의 몇 배를 징수, 착복하기도 하였다.
군정은 원래 6년에 한차례씩 작성되는 군적에 의거하여 번상병을 차출하고 그들에게 보(保)를 정급(定給)해 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병무 행정의 하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엽부터 번상병에 대한 방군수포의 관례가 생기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정은 군포의 부과·징수를 행하는 수취행정으로 변하게 되었다. 게다가 부유한 농민, 권문양반 등은 아전과 결탁하여 군역을 면할 수 있어서 군보의 수는 날로 줄어들고 가난한 군보에 대한 징포는 더욱 가혹해졌다.
이에 1750년(영조 26) 균역법을 제정, 군포 2필을 1필로 반감하고 그 재정상의 부족액을 잡세로 충당하였으나, 기본적 성격에는 변화가 없어 양인의 도망과 피역은 여전하였다. 군포의 수취는 뒤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시행한 호포법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환정은 춘궁기에 농민에게 식량과 종자를 대여하였다가 추수 후에 회수하는 구빈(救貧)의 행정이었으나, 15세기 말엽부터 대여한 환곡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증대되고, 원곡을 보관하는 중에 자연 감축되는 양이 적지 않았으므로, 이를 보충하는 방편의 하나로 대여한 환곡의 1/10을 모곡이라는 이름 아래 첨가, 회수하는 <십일취모법(什一取耗法)>을 시행하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정이 더욱 궁핍해지자 정부에서는 이 제도를 한층 확대하여 국가세입의 일부를 이루게 하였다. 이에 따라 <취모보용(取耗補用)> 명목의 환곡은 걷잡을 수 없게 늘어났고, 환정은 날로 문란해졌다. 이러한 폐해는 후기로 내려올수록 극심하여 19세기 초·중엽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전호 또는 소작농민이 규정된 소작료 상납을 거부한 운동. 소작농민은 생산물의 50%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하는 병작반수의 고율소작료나 그 밖의 소작제도가 지주측에 유리하게 적용되어 부담이 무거움에 따라 지대 인하나 소작조건 개선 등의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병작반수의 타작제에서는 탈곡과정에서 편법을 쓰거나 볏단을 빼돌리는 등 소극적 방법을 취해왔으나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지주층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집단폭력봉기로 발전하였다. 1833년(순조 33) 장토(庄土)의 전호들이 흉년을 이유로 감관(監官)·도장(導掌)의 수세를 조직적으로 거절하였고, 1891년부터는 전라도지역 균전에서 민전의 수탈과 도조의 남징(濫徵)을 둘러싸고 민란이 일어나는 등 많은 항조운동이 이어졌다.



2. 미륵신앙 彌勒信仰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로서의 미륵을 믿는 신앙. 크게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도솔천 상생신앙과, 말세적인 세상을 구제하러 미륵이 하생하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의 2가지 흐름으로 나누나 근본적으로는 이상세계를 제시하는 미륵의 대승설법이 이루어지는 복지사회에의 염원에서 나온 불교적 이상사회관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인도에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미륵보살상을 통해 간다라 미술의 유입기인 BC 2세기경부터 모든 중생의 이익을 원하는 미륵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중국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룽먼[龍門]석굴의 미륵상들을 통해 6세기 북위 불교의 미륵신앙 열기를 추정할 수 있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보살들에 대한 신앙 중에서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이 가장 오래되었고, 또한 미륵의 명칭은 초기 경전에서 후기 경전까지 끊이지 않고 나오기 때문에 대중들에 대한 영향도 깊다. 특히 말세사상과의 연관은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에게 부각되어 사회 모순을 해결짓는 구세주로서의 미륵을 갈구하는 사회개혁 이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한국의 초기 불교 수용에서부터 전래된 미륵신앙은 특히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 통치 이념으로서 응용되어 백제의 무왕은 익산 미륵사의 창건으로 왕권을 강화하며, 신라 진흥왕은 왕자의 이름을 금륜과 동륜으로 지어 전륜성왕의 이상적인 치세를 흠모하는 정치를 펼치며, 신라의 화랑 또한 미륵의 화현(化現)인 국선을 따르는 청년집단으로 결성되어, 고대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주체로 형성되었다.
또한 미륵경전에서 강조된 10가지 착한 행위는 참회를 통해 지난 죄업을 소멸하는 수행을 낳게 되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노힐부득(努慰夫得)의 현신성도(現身成道) 설화는 대중 구제적인 방편과 함께 자신을 연마하는 미륵신앙의 정점을 보여준다. 후삼국시대 궁예의 경우는 말세적인 민심을 이용하여 자신이 미륵이라 하여 일시적인 대중의 호응을 얻기도 하는데 이 또한 미륵하생의 원용이다.
근세 한국에서 일어난 증산교 및 용화교 등도 사회 갈등기에 일어나는 민중의 소망을 사회구제적인 미륵신앙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운동이다.

 

 


3. 정감록(鄭鑑錄)

조선 시대 이래 민간에서 널리 읽힌 대표적 예언서. 저자나 출간시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정감과 이심의 대화형식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정감 혹은 이심을 저자로 보기도 하고, 정도전이 조선의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고 민심을 조작하기 위하여 저술하였다고도 한다. 형식면에서는 예언설·참요(讖謠)·역수(易數)의 풀이와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석 등이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사상적으로도 유교의 외도(外道)나 도교 및 참위설·음양오행설 등의 다채로운 배경을 가지고 있다.
표현기법상의 특징은 직설적 표현을 피하고 은어·우의(寓意)·시구(詩句)·파자(破字)를 많이 써서 해석이 어렵고 애매한 표현이 많다. 반왕조적이며 현실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난세에는 풍수설에 따라 복정(卜定)된 피난처에서만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으며, 정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나타나 이씨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역모도 이런 내용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었고, 그 뒤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과 19세기 민중운동·동학농민운동을 기점으로 속출한 민중항거 대부분이 《정감록》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만큼 민중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통사회의 황당한 예언서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조선시대의 사회사상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필사본.

 



4. 도참사상 圖讖思想

미래의 길흉에 관한 예언을 준거로 따르면서 우주관·미래관·정치사상 등을 전개하고자 하는 믿음. 점복과 마찬가지로 대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미래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현상이지만 특히 한국·중국 등에서 크게 성행하면서 역사와 함께 그 성쇠해 왔다. 도참은 미래를 암시해 주는 상징·징조인 <도>와 참언(讖言), 즉 예언의 뜻인 <참>을 개념으로 동양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천문·지리·역학은 물론 도교·불교 등과도 관련을 가지면서 발전하였으며 한국에서는 특히 풍수지리에 관한 도참사상이 그 주류를 이루어 왔다.

 

 


5. 비기

풍수지리·음양도참에 대한 책들.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국가의 장래에 관하여 도참사상 및 음양오행설에 의해 행하는 예언적 기록들로 천문·역산(曆算)·음양·점후(占候) 등에 관한 것이 중심내용이다.
유형별로는 조상이 자손의 장래를 염려하여 남겨놓은 것과 국가장래에 관한 것, 그리고 개인의 운명과 관계되는 것 등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후한서》 <양후전>에 비기에 관한 내용이 처음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한 춘추전국시대 말에 음양오행학이 깊이 연구되고 도참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비기에 관한 사상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에서 발달한 이 사상은 신라 말 무렵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도선이 여러 비기를 남기면서 널리 전파되었다. 고려 때 성행한 《도선비기》는 그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국가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태조는 도선의 비기인 참서의 내용을 참작해 자손에게 남긴 십훈요 가운데 사원 창건할 적에는 산수의 순역을 점쳐 보아 지덕을 다치지 말라고 하였다.
비기 가운데 《징비록》은 고려의 창립과 멸망, 조선의 건국과 멸망, 그리고 정씨의 계룡산 도읍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기록이다. 《동세기)》는 이성계의 28대 후에 조선이 망한다는 점과 일본의 침략, 남북분단과 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계룡산에 도읍할 때까지 일어날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그 밖에 《운기귀책》 《삼한산림비기》 《오백론사비기》 《옥룡자기》 《무학비기》 등이 있다.

 

 


6. 서학(西學)

조선 중기 이후 조선에 전래된 서양사상과 문물. 좁은 의미에서는 가톨릭교를 의미하며, 그 때문에 이를 서교 또는 천주학이라고도 하였다.
과학의 발달과 종교개혁을 통하여 발전된 유럽 여러 나라의 근대적 자본주의 세력은 16세기 이후 상품거래, 식민지 개척, 가톨릭교의 전파 등으로 동양에 영향을 끼쳤다. 서양의 정치·경제·문화의 세력은 중국의 도덕적 고전문화를 압도하여 중국을 새롭게 각성시켰다. 중국에 해마다 많은 중국 사신과 수행원을 파견하는 조선도 자연히 이들을 통하여 서양의 문물·학술 등에 접하게 되었다.
중국을 통한 서양문화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는데, 최초의 것은 세계지도와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였다. 1631년(인조 9)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천리경·서포·자명종·염초화(焰硝花)·만국지도·천문서·서양풍속기·천주교서적 등을 가져왔다. 1645년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서 천문·산학·서양종교에 관한 책들을 많이 가져 왔고, 지구의·천주상도 가져 왔다.
한편 박연 및 하멜 등 서양인이 표류, 조선에 이르게 되어 서양식 대포의 제조 등 새로운 서양 과학을 배우게 되었다. 서양문물이 이와 같이 조선 시대의 학자들에게 알려져 그들의 학문적 탐구심의 대상이 되었고, 1654년(효종 5) 조정에서 개량력인 시헌력을 채용하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물과의 접촉으로 영국·프랑스 등의 문명국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들의 세계관에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천문학을 비롯한 서양학술의 성과에 대하여 놀라, 당시의 지식인들은 실증적이고 경험주의적인 관찰의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서양문물과 함께 전래된 가톨릭교에 대하여, 처음에 유학자들은 종교생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학문적·사상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서 흥미를 느꼈다. 당시의 학자 중에서 가톨릭교에 흥미를 느끼고 또 그 영향을 받았던 사람은 권철신·일신 형제,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이벽·이가환 등이었다.
가톨릭교의 사상은 양반사회의 체제가 무너지고 전통적인 유교적 규범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당시의 사회 풍조에 안성마춤이어서, 현실 생활을 하나의 고난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여러 사회 계층의 사람들, 특히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신앙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실세(失勢)한 남인학자에 의하여 신봉되었으나, 차차 재야의 양반·중인·상인,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압박을 받던 부녀자층에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어 갔다.
그런데 가톨릭교는 그 의식 및 교리가 조선시대 지배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유교의 그것과 상치되는 점이 많으므로, 사교로 인정되어 1786년(정조 10) 이래 계속해서 탄압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1801년(순조 1)에 이른바 신유박해가 일어나 앞에서 열거한 남인학자 등 많은 명사(名士)와 신도들이 죽었다.
가톨릭교는 조선시대의 국가·사회조직에 대하여 결정적인 개혁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지식인에게 전통적인 성리학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또 조선 후기의 개화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7.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순조 1)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 천주교회는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 등으로 순교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으로 1800년에는 교인 1만 명으로 교세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천주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세력에 의한 성토·상소·박해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조는 “사교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의 묵인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대왕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에 대하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그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 대왕대비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였다.
오가작통법을 동원한 수색에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주문모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적 평신도들이었다. 주문모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되었다.
그리고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정약종·최창현·강완숙·최필공·홍교만·김건순·홍낙민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왕족인 송씨(정조의 서제인 은언군의 부인)와 신씨(은언군 며느리)도 사사되었다. 한편, 지방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순교하였다.
내포교회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관검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는 한국천주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숨어, 천주신앙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한편, 종래 지식인 중심의 조선천주교회가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된 점도 신유박해와 관계되는 천주교회 발전의 모습이었다.

 

 


8. 기해박해 (己亥迫害)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 기해사옥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형조판서 조병현으로부터 그 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이어 사헌부집의 정기화도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박희순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정하상·유진길·조신철 등 중요인물이 붙잡혔으며, 당시 주교 앵베르는 교인이 고초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방과 샤스탕에게도 자현(自現)할 것을 권고한 쪽지를 보내고 자현함으로써, 조선 교회 재건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대하여 〈상재상서〉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하였다.
조정에서는 6월에는 이광열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하고,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형에 처하였다. 이때 피해를 입은 교도수는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하여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한 자 1명, 사형된 자가 118명 등이었다.
그러나 현석문이 쓴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자가 54명이고,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9. 최제우(崔濟愚, 824(순조 24) 경북 경주~1864(고종 1)

동학의 교조. 본관은 경주. 초명은 복술·제선. 자는 성묵, 호는 수운·수운재


1. 성장기
  아버지는 옥()이며, 어머니는 한씨이다. 7대조 진립은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사후에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의 시호를 받았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한 유생으로 2번 상처를 하고 과부이던 한씨를 만나 63세에 최제우를 낳았으나 이미 동생의 아들 제녕을 양자로 들여 그는 서자로 자라났다.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수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10세 때에는 이미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와 혼인했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농사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화재까지 당하여 집안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3년상을 마친 뒤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면서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와 의술·복술 등의 잡술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2. 수련과 득도
  1855년(철종 6) 3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승려로부터 〈을묘천서 乙卯天書〉를 얻고 난 후 더욱 수련에 힘써 1856년 양산군 천성산의 내원암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가 죽어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했으며 다음해 적멸굴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이후에도 울산 집에서 계속 공덕을 닦았으며, 1859년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 뒤에 구미산 용담정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이무렵 어리석은 세상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 제우라고 고쳤다. 1860년 4월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공중으로부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사람들에게 포교할 준비를 했다.

3. 포교와 탄압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여러 가지 소문도 떠돌게 되고 지방의 유림과 친척 중에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하여 이듬해 3월 경주로 돌아갈 때까지 남원의 은적암에 피신해 있었다. 피신중에 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는 것을 반성하고 표현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으며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교훈가〉·〈도수사〉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제자 중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전도에 힘쓰게 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1862년 9월 이술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해줄 것을 청원하여 경주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석방했다. 이후 그는 신도들에게 세상의 오해를 받기 쉬운 언행을 삼가하도록 경계했다. 한편 그가 무죄석방되자 사람들은 관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해 포교가 더욱 용이해졌다. 신도가 늘어나자 그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11월 왕명을 받은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에서 효수형에 처해졌다.
4. 저술과 사상
최제우의 글은 그가 처형당한 후 신도들에 의해 간행된 〈동경대전>· 〈용담유사〉에 남아 있다. 〈포덕문〉·〈수덕문〉·〈논학문〉·〈불연기연〉 등 한문으로 씌어진 4개 교의문은 〈동경대전〉에 실려 있고, 〈용담가〉·〈몽중노소문답가〉·〈교훈가〉·〈도수사〉·〈안심가〉·〈흥비가〉·〈권학가〉·〈도덕가〉 등 8편의 한글 가사는 〈용담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한문으로 된 4개의 교의문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지었고, 8편의 가사는 한글로 구송에 편하도록 쉽게 풀어썼다는 점에서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나 일반 민중을 주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 시천주'(侍天主)로서 한울님을 모시면 누구나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환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천주의 개념은 주술적인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고 우리 민족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교나 불교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 운이 다한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봉건지배층이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서양을 남만으로 파악한 것과는 달리 그는 서양열강을 무사불성(無事不成)의 강대한 외래자로 보아 현실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일본에 대해서는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왕조를 포함한 양반사회질서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혁되어야 한다는 자연적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지상천국이 건설된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주장했다. 한편 적서나 반상의 구별없이 누구나 천주를 마음에 모시면 신분에 관계없이 군자가 된다고 하여 만민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관을 보여주었다.

 

 


10 항조 운동 抗租運動

전호 또는 소작농민이 규정된 소작료 상납을 거부한 운동. 소작농민은 생산물의 50%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하는 병작반수의 고율소작료나 그 밖의 소작제도가 지주측에 유리하게 적용되어 부담이 무거움에 따라 지대 인하나 소작조건 개선 등의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병작반수의 타작제에서는 탈곡과정에서 편법을 쓰거나 볏단을 빼돌리는 등 소극적 방법을 취해왔으나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지주층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집단폭력봉기로 발전하였다. 1833년(순조 33) 장토(庄土)의 전호들이 흉년을 이유로 감관(監官)·도장(導掌)의 수세를 조직적으로 거절하였고, 1891년부터는 전라도지역 균전에서 민전의 수탈과 도조의 남징(濫徵)을 둘러싸고 민란이 일어나는 등 많은 항조운동이 이어졌다.

 

 


12. 홍경래의 난(洪景來─亂)

1811년(순조 11)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
[발생 배경]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다. 조선 후기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
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지주와는 다른 서민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선된 농업 생산기술과 시장의 확대라는 유리한 여건 속에서 차경지의 확대를 통해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부농이 성장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영세빈농·전호가 되었다.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이 시기 농민층 분해는 다수의 소농민들을 중세사회의 특징인 토지에 대한 긴박을 해체시켜 임노동자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부농·서민지주로 양극 분해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상공업은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가 이루어지고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개성상인이나 의주상인들은 대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등 상권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구조에도 부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의 증가와 평민·천민의 감소, 몰락양반의 다수 존재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동요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봉건사회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특히, 정치적으로 치열했던 17, 18세기의 당쟁이 끝나고 노론에 의한 안동 김씨 척족의 일당 전제가 성립됨으로써 삼정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 특권 상인과 지방 사상인간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더욱이 평안도 지방은 대청무역이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더욱 활발해져서 송상·만상 가운데는 대상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1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견직물업·유기 등 수공업 생산과 담배 등 상품작물의 재배, 금·은의 수요 급증으로 인한 광산 개발이 활발하였다.
그에 따라 양반지주·상인층에 의한 고리대업의 성행으로 소농민의 몰락도 심화되었다. 반면 일부 농민층은 부를 축적해 향촌의 향무층으로 진출했으며, 빈농·유민들이 잠채광업에 몰려들고 있었다.
[전개 과정]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이 난은 10여 년 간 준비되었던 조직적 반란이었다. 여기에는 홍경래·우군칙·김사용·김창시 등으로 대표되는 몰락양반·유랑지식인들의 ≪정감록≫ 등에 의한 이념 제공이 있었다.
그리고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새로이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요호(饒戶)·부민(富民) 등 부농·서민지주층과 사상인층의 물력(物力) 및 조직력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역노출신으로 대청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산의 부호 이희저의 집이 있는 다복동을 거점으로 삼고, 각지의 부호·부상대고들과 연계를 맺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운산 촛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광산노동자·빈농·유민 등을 급가고용해 봉기군의 주력부대로 삼았다.
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특히 각지의 내응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즉 이 때의 내응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 등 향임과 별장·천총·파총·별무사 등 무임 중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대부분이 납전승향(돈을 주고 향임을 얻게 됨)한 계층이었다. 그러나 곧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추격을 받은 농민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전세가 이와 같이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주력부대가 지닌 취약성 때문이었다. 농민군은 비록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으로 대표되는 봉건 지배층에 대한 공동의 이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부인 부농·상인층과 일반 병졸을 구성하는 소농·빈농·유민·임노동자층이 가지는 상호 대립적 성격으로 인해 이들 하층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에 대해 격문의 내용에서는 단지 서북인의 차별대우,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정진인의 출현 등만을 언급할 뿐 정작 소농·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를 대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휘부가 점령 지역에서 이임·면임 등에게 병졸들을 징발하도록 한 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향군·민병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이러한 강인한 저항은 곧 주력부대의 구성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정주성의 농민군은 이전의 급가고용이나 소극적 참여자가 아니라 주로 박천·가산 일대의 소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관군의 초토전술에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의 대다수 농민들이 정주성에 퇴각해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관군의 약탈에 피해를 입은 성밖의 농민들의 협조와 또 지휘부에서도 부민에 대한 가혹한 징발을 통해 평등한 분배를 제공한 때문이었다. 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남정 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영향 및 평가]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민간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난에서 부농과는 달리 소극적인 구실만을 담당했던 광범한 소농·빈민층은 이후 임술민란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또, 이 난에서는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체제가 구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평안도 지방이 주요 무대였지만 동시에 도성에서 소론 박종일을 중심으로 중인·서얼층이 연계해 정권 탈취를 계획한 것이라든지, 기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층의 산발적인 소요는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 난에 대한 평가는 6·25 이전에는 오다(小田省吾) 등에 의해 당쟁사적 관점에서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라든가, 이를 이용한 홍경래 개인의 정권 탈취 기도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체성 비판의 일환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자본주의 맹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달라졌다. 즉 그 주도층의 성격을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경영형부농, 서민지주, 사상인 및 일부 몰락한 양반지식인 등이 광산노동자·유민·빈농을 동원해 일으킨 반봉건농민전쟁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13. 임술민란 壬戌民亂

1862년(철종 13) 삼남 약 71개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중세 사회 해체기에 사회모순이 전면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그 첫째로 농업 생산력과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농민층이 급속히 분해되었으며, 그 결과 자영농민층의 몰락이 심화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주와 소빈농·작인 사이에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둘째, 위정자들도 '삼정의 문란'이라고 걱정할 정도로 조세를 둘러싼 폐단이 심각하였다. 조세문제는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키면서 제기한 문제에 잘 나타나 있다. 농민들은 각종 조세가 토지에 집중 부과되는 수취방식의 변화와 화폐납이 일반화되는 추세 속에서 높은 결가(結價)가 부과되는 폐단, 수령과 관속이 축낸 환곡, 즉 이포(吏逋)를 농민에게 전가하는 행위와 장부상으로만 지급된 허액(虛額) 등과 같은 환곡을 둘러싼 폐단, 신분제 변동과 피역으로 인해 역을 부담하는 농민의 수가 적어짐으로써 생긴 백골징포·황구첨정과 같은 군역세의 폐단을 제기하였다.
이 외에 지주·부민의 고리대와 지방관청이 재정확보의 수단으로 실시했던 식리(植利)의 폐단도 지적하였다. 특히 삼정 가운데 환곡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형태로 행해진 수탈은 민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제반 조세문제는 납부체계의 방만성, 수령과 관속의 부정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사회 변화에 맞추어 제반 제도를 개혁하지 못하고 구질서만 붙들고 농민들을 괴롭히는 지배층에 맞서 농민들은 19세기에 들어 끊임없이 저항하였다. 많이 사용한 저항방법은 관에 연명으로 호소하는 등소(等訴)였다. 등소로써 폐단이 시정되지 않으면 농민들은 전면 봉기를 계획하였다.
이러한 저항의 연장선 위에서 이른바 임술민란이 전라도 38개 지역, 경상도 19개 지역, 충청도 11개 지역, 기타 3개 지역에서 일어났다. 농민들을 조직하고 봉기를 주도한 사람들은 몰락양반, 농촌 지식인, 재지 명망가 등이었다.
주도자들은 조세 수취를 둘러싼 모든 일들을 논의하고 일정한 공론을 형성하는 향촌 지배층 중심으로 운영되던 향회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모으고 투쟁방향을 논의하였다. 향회가 농민들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할 경우, 농민들은 민회·이회·도회 등과 같은 스스로의 모임을 만들었다. 대회를 열기 위해 주도자들이 마을 일을 주관하는 면임·동임에게 통문을 보내면 면임·동임들은 농민을 모아 대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들 조직은 군현 단위 조직이었으므로 군현을 넘어서는 항쟁은 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대회에 참여한 농민들은 집단이라는 열기에 고무되어 보통은 읍내로 몰려가 평소 농민들을 괴롭히던 이서들을 구타하고 각종 문서를 불태우고 관아와 부민의 집을 부수었다. 심지어 익산민란의 경우와 같이 수령을 묶어 군현 경계 밖에다 버리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응징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앙에서 파견된 안핵사·선무사·암행어사에게 직접 정소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조선정부는 농민들의 요구에 따라 널리 삼정책을 모집하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이정책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수령에 대해서는 사전에 민란을 막지 못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경상우병사 백낙신과 진주 목사 홍병원을 처벌하고 전라감사 김시연의 관직을 삭탈하는 등 민란이 일어난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였다. 민란 주도자들은 효수하였으며 적극 가담자는 극률로 처벌하였다.
임술민란에서 농민들은 중세적인 조세제도를 철폐 또는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수령·관속에 대한 공격과 읍권 장악을 통해 무너져가는 중세적인 통치질서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11. 진주민란(晉州民亂)

1862년(철종 13) 2월 18일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반관숙정운동.


[발발 원인]
철종 때의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직접 동기는 경상도우병사 백낙신의 불법 탐학에 있었다. 그는 부임한 이래 갖은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한 금액이 줄잡아 4만∼5만 냥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진주목의 역대 불법 수탈곡인 도결 8만4000여 냥을 일시에 호별로 배당해 수납하려 하였다. 우병영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해 신구범포곡인 환포(還逋) 7만2000여 냥을 농가에 분담, 강제로 징수하고자 하였다.

[전개 과정]
이러한 처사는 그렇지 않아도 파탄 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을 극도로 분격시켰다. 진주에서 서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유곡동에 사는 유계춘은 김수만·이귀재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농민운동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고 보다 많은 농민을 동원할 방법과 군중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나아갈 행동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러던 중 이웃 단성 주민의 봉기에 자극된 그들은 언방(한글로 된 방문)·회문·통문 등을 지어 발표하면서 마침내 2월 18일 이른 아침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먼저 서쪽에 있는 수곡 장터를 휩쓸고 이어 덕산 장터로 몰려가서 철시를 강행하였다. 여기에서 위세를 떨치게 된 농민 시위대는 스스로를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나 농기구를 쥐고서, 유계춘이 지었다는 노래를 부르며 구름처럼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시위에 불참하는 자에게는 벌전(罰錢)을 받았고, 반대하는 자는 집을 부셔 버렸다. 이 때문에, 이제까지 잠잠하던 다른 지역의 농민들도 속속 이 대열에 가담해 그 세력이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하룻밤을 성밖에서 지샌 농민 봉기군은 19일 우병사 백낙신과 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통환(統還)과 도결을 혁파한다는 완문(完文)을 받아 냈다. 그러나 흥분한 군중은 우병사를 첩첩이 둘러싸고, 그의 죄상을 하나씩 들추어 협박하는 한편, 부정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과 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그들이 자진 해산하기까지 4일 동안에 부정 향리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4명을 타살하고 수십 명은 부상을 입혔다. 또 평소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부호들을 습격해 23개 면에 걸쳐 126호를 파괴하고 재물을 빼앗으니, 그 피해액이 모두 10만냥에 달하였다고 한다.

[수습 과정 및 영향]
이에 조정에서는 2월 29일에 부호군 박규수를 진주안핵사로 임명해 수습하게 하였다. 그는 약 3개월에 걸쳐 이 민란을 수습했는데, 그 처벌 상황을 보면 농민 측은 효수 10명, 귀양 20명, 곤장 42명, 미결 15명이었고, 관리 측은 귀양 8명, 곤장 5명, 파직 4명, 미결 5명이었다. 그러나 이 민란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다른 지방의 농민을 자극해 이 해에 전국에 걸쳐 30여개 지역에서 농민이 봉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