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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주의 (socialism)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관리, 자본에 의한 임금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 자본주의적 시장생산의 무정부성 등에 반대하여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와 관리, 계획적인 생산과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이론 또는 사상, 운동 그리고 그와 같은 구상을 실현한 체제를 말한다. 사회주의란 용어는 1827년 영국 오언파의 출판물에서 처음 쓰였으며, 사회주의 사상은 산업혁명 이후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생산의 무정부성, 불평등, 빈곤 등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하였다.
2. 무정부주의(아나키즘, anarchism)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기관의 강제수단의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및 운동.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an archos'에서 연유한 이 말은 일찍이 영국 청교도 혁명에서의 수평파(Levellers)나 프랑스 혁명기의 앙라제(Enragés:전투적 급진파)를 비난하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법규를 부인하고 재산을 압제의 수단으로 간주하며 죄란 사유재산과 권력에 따르는 사회적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약 인간이 법과 사회체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상호부조의 원리를 실천하게 된다면, 사회성과 타고난 기질의 자유로운 발전에 기인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해왔다. 무정부주의의 내용은 사상가에 따라 각양각색이지만 주요한 차이는 첫째, 이상사회에 있어서 집단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가, 둘째, 사적 소유를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셋째,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용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3가지 관점에서 발생한다. 무정부주의의 종류에는 윌리엄 고드윈,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막스 슈티르너, 레프 톨스토이, 폴 굿먼, 허버트 리드등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와 미하일 바쿠닌으로 대표되는 집산주의적(集産主義的) 무정부주의 그리고 페테르 크로포트킨의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가 있다.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경계로 해 공상적 무정부주의와 과학적 무정부주의로 나누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이론에 치중되어 있는 철학적 무정부주의와 정치·사회적인 실천방법까지 구상하고 있는 혁명적 무정부주의로 대별된다. 이밖에 19세기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이 있는데, 노동조합의 직접행동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으로 라틴 제국과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3. 민립대학설립운동
1922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교육령에 따라 관립 경성제국대학 설립에 대응하여 이상재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족교육과 민족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민립대학을 설립하려고 한 운동이다. 이것은 일제가 3·1운동 후 문화통치를 선포하고 ‘내지의 연장으로 인정하여 조선을 동화’하려는 기본방침을 세웠다. 일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선무차별교육을 내세운 교육령 개정을 서둘렀다. 1921년 4월 박사직·김병규 등이 창립한 교육개선회는 한국 고유의 민족성을 존중하고 계승하는 한국인 본위의 교육을 시행할 것을 총독부에 촉구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1922년 2월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모든 교육정책의 입안과 운영, 전문학교·대학 그리고 예과 설립자격은 총독부에서 관장한다는 안을 확정했다. 이를 위해 1923년 3월 조선교육연구회를 조선교육회로 개칭하고 일본인 및 친일한인들을 등용, 지방조직을 확대하여 식민통치의 유지·옹호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한편 3·1운동 이후 민족운동 진영에서도 한국인본위교육을 합법적으로 실행하자는 실천운동이 진행되었다. 특히 교육담당자들이 일본인이나 친일파들에게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하에 순수한 민족교육을 전제로 한 최고의 교육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인식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22년 2월 3일 동아일보는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는 논설에서 민족적 위기감을 느끼며 민립대학 설립을 조선인의 생명운동이요, 문명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설립운동의 당위성을 적극 주장했다. 또한 조선청년회연합회는 같은 해 6월부터 독자적으로 일반 대중을 위한 평민대학을 개설하여 교육진흥과 현대과학사상 등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1922년 11월 23일 서울 남대문 식도원에서 이상재·현상윤 ·한용운·이승훈 ·허헌·송진우·장덕수·이갑성·남궁 훈·홍덕유등 각계 인사들은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하고,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참여한 460여 명의 대표가 한 민족의 지식욕을 충족시킬 만한 대학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이므로 민립대학을 설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취지에 따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사업계획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민립대학 설립기금 1천만원을 갹출하되 이를 3년간 분할 모금할 것을 계획하고 제1차 연도에는 400만 원으로 대지 5만여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 ·경제과 ·문과 ·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 원으로 공과를 증설하고 이과와 기타 학과의 충실을 기하며, 제3차 연도에는 300만 원으로 의과와 농과를 설치한다는 것 등이었다.
총회는 이상재 ·이승훈 ·조병한 ·김탁 등 30여 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는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했다. 1923년 4월 2일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가 소집되어 위원장에 이상재, 상무위원에 한용운 ·강인택 ·유성준 ·한인봉 ·이승훈 등 9명을 선출하고 지방선전위원 13명을 선정, 파견하였다. 그 결과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에 지방부가 조직되고 만주 간도와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확산, 조직되었다.
이와 같이 민립대학설립기성회는 중앙부(집행위 ·감사위 ·회금보관위)와 지방부를 조직하여 민립대학설립에 대한 선전과 모금운동에 착수했고 이승훈 ·조만식 ·안재홍 ·이갑성 등 유력자들은 지방순회를 하면서 도처에서 강연회를 열고 민립대학 설립취지를 천명하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조짐이 보이자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는 한편, 조선총독부는 민립대학기성회가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회를 중지하고 청중을 강제로 해산하는 등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탄압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좌절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많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학을 설립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주의적이었는가는 23년 한해 동안 제1차 사업자금으로 책정한 4백만 원의 모금 중 백만원도 모금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당시 동아일보가 이 운동이 실패하게 된 원인을 “아마 극도의 빈궁이 우리를 그러한 악덕에 빠지게 한 것이려니와, 우리는 금전욕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식욕을 충족할 만한 성의가 없다.”고 언급한 것은 이 운동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일제의 식민지수탈 속에서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 민중들에게는 문맹퇴치를 위한 최하급 교육조차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들에게 최고학부인 대학교육이란 그야말로 환상에 불과하였고 오히려 노동자들의 강습소와 농촌의 야학과 같은 대중교육의 실시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실패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이와 같이 식민지하의 대다수 민중의 절실한 요구를 간과한 민족 지도자들의 주장이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출처 : 두산대백과사전)
4. 물산장려운동
1920년대에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항거하여 벌였던 범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이다. 3·1운동 후 개화한 근대 지식인층 및 대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물자 아껴쓰기 및 우리 산업 경제를 육성시키자는 기치 아래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앞장서 벌여 나간 운동이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탄압은 날로 심해지고, 1923∼1924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침투, 확산되면서 민족정신 말살정책이 점차로 노골화하여 갔다. 이때 3*1운동에 참가하였던 민족 지도자들이 민족운동의 부흥을 위해서는 우리 힘의 배양이 절실함을 주장하면서 벌인 운동이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시발이었다.
1923년 1월 9일 유진태·이종린·백관수 등 20여 단체의 대표 160여명이 서울에 모여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한 후 20일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에서 창립총회를 개최,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2월 16일에 3000여 명의 회원들이 참가하여 발족시킨 모임이 이 운동의 중추적인 기구가 되었다. 집행기관으로 이사회를 두고 그 아래 경리부·조사부·선전부를 설치하였으며, 회의실무를 계획·집행하는 상무이사를 두는 한편, 이사장에는 유성준이 선출되었다. 본부를 서울 견지동에 두고 각 지방에 분회를 설치하였다.
이때의 기본 실행 요강을 살펴보면,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소금-과일-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우리 것을 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이 세 가지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그리고 집행부로 경리부·조사부·선전부의 3부를 두었으며, 조사부는 내외 경제사정을 조사하고 선전부를 통해 위의 기본방침에 따라 대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 운동은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 지도자들과 연희전문학교 학생 들이 중심이 된 자작회가 주축이 되어 1920년 7월 20일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인대회를 가진 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평양에서 비롯된 토산품 애용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며 경제적 착취를 당해오던 시민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 소비조합을 비롯한 민족기업 등의 설립을 촉진시켰으며, 이 움직임이 인천을 거쳐 서울에서의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서울에서 조직된 토산품애용부인회와 경남 의령에서 시작된 토산품장려 및 금연실천운동, 그 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금주단연운동, 토산품 애용운동은 기생들까지도 동참 협력한 거족적 애국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하지만 1924년 창립 1주년 기념 구정 대강연회를 끝으로 점차 열기가 식어가면서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것은 이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주로 자본가나 상인층 등으로,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일부 자신들의 이해문제와 연관된 입장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했던 상품소비운동 혹은 민족기업설립운동 등은 절대적 궁핍에 시달렸던 당시 일반 민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점이 많아 민중의 지속적인 참여와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토산물 가격의 급등으로 일반 서민들보다 기업과 상인들이 이익을 내면서 더욱 지지를 잃게 되었다. 또 무산계급과 관계없는 유산계급을 옹호하는 운동이라고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1929년 제7회 정기총회에서 선전 계몽에 중점을 두었던 종전에 비해 민족기업의 육성을 위한 자료조사와 경영지도면을 크게 고려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1934년경부터 다시 재정난으로 운동이 침체되었고, 1940년 8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출처 : 두산대백과사전)
<조선 물산 장려회 궐기문>
내 살림 내것으로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을 오늘에야 우리는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 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며 살고서 볼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 사람, 조선 것
4. 형평 운동(衡平運動)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 백정은 도살업 ·가죽·유세공 등에 종사하는 천민층으로, 주로 삼남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제상으로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특히,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인 지배관계를 온존하는 정책을 써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 등에 반드시 신분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당시의 백정은 호적상 도한(屠漢)이나 붉은 점으로 표시하게 했다. 이러한 백정들의 불만은 형평사 조직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이학찬(백정) ·신현수(양반) ·강상호(양반) ·장지필(백정) 등은 형평사를 설립하였다. 형평사 창립 후 형평운동은 불과 1년 사이에 각도에 형평사 지사 12개, 분사 67개가 설비되었다. 1924년 2월 10 ·11일 형평사전국임시총회가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경상도에 지반을 가진 강상호 ·신현수 등 보수파(남파)는 진주본사를 고수할 것을 주장한 반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에 지반을 가진 장지필 ·오성완 등 혁신파(북파)는 경성으로 이전할 것을 주장하여 대립했다.
혁신파는 2월 13일 형평사 혁신동맹준비회를 조직하고, 3월 12일에는 혁신동맹창립총회를 열어 본사의 서울로의 이전과 잡지 《형평》을 발간, 피혁공장 설립 등을 결의하고 강상호 등의 부정을 추궁했다. 보수파도 4월 24 ·25일 전국형평사대회를 열었다.
그 뒤 양파의 반목과 대립을 염려한 유지들에 의해 5월 21일 남북협의회가 열려 현상타개의 의견교환이 이루어지고, 7월에는 양파 간부들의 간담회가 열려 형평사통일의 토의가 논의되었다. 이 결과 8월 15일에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가 개최되어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로 고치는 동시에 그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기로 했으나, 다시 내분이 일어났다.
형평사의 통일은 1925년 4월 24 ·25일에 열린 제3회전국대회에서 달성되어 이후 조직과 운동이 확대되었다. 각지에 형평청년회가 조직되고 그 중앙기관으로 형평사청년총연맹이 만들어졌다.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형평학우회도 조직하여 각지에 권학단도 파견했다. 이러한 정세 아래 각지의 형평청년회가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였다.
1926년 장지필은 재경사상단체 신년간담회에 참가하여 형평사 조직의 확충강화와 무산운동으로의 진출을 선언하였다. 같은해 4월에 열린 형평사 제4회대회에서도 무저항주의의 일소를 가결하고 사회운동단체와의 적극적인 제휴 아래 실천운동에 나설 것을 선언하였다. 이후 각종 파업소작쟁의 등에 참가하였다.
1927년 1월 고려혁명당 사건에 장지필 ·서광훈 등 중앙간부가 연좌되어 이후의 형평운동에 급진파 ·온건파의 대립의 격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같이 해체되고 말았다.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이고 일제 강점기에 다른 사회운동단체와의 제휴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일익도 담당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5. 원산노동자총파업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약 4개월에 걸쳐 전개된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전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의 총파업.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의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규모의 파업으로, 그 발단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제유공파업에서 비롯된다. 당시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가 있었는데, 그 지배인과 주요 간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들 일본인은 평소 한국인 노동자를 민족적 멸시와 차별로 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타마(兒玉)라는 일본인 감독은 난폭하여 한국인에게 욕설과 구타를 일삼았는데, 1928년 9월 초에 또다시 한국인 유조공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120여 명의 노동자들이 고타마의 파면과 대우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일으켰다. 이렇게 되자 원산노동자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고 있던 원산노동연합회에서는 파업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측과의 교섭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이를 무시하고 경찰에게 파업의 주요 인물을 검거하게 하는 한편, 일본인 노동자를 모집하여 작업에 임하게 하였으나 그들도 작업을 거부하였다.
더욱이 문평노동자들이 원산노동연합회의 후원으로 장기전 태세를 갖추자 회사측에서는 다가오는 유류 성수기를 앞두고 작업을 중지할 수 없어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락하는 협정을 체결하였고, 파업은 9월 28일에 해결되었다.
이 때 맺은 노사협정에는 최저임금·상병위자료·해고수당 등에 관한 협정을 3개월 내에 체결하기로 약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한이 지나도 이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1928년 12월 29일 산하노동조합인 문평제유노동조합을 위해서 협정체결최고서를 회사 측에 제출하였다. 회사 측에서는 이에 대하여 자기들은 원산노동연합회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답하며 그 요구를 무시하였다. 이에 원산노동연합회는 회사 측에 그 회답을 취소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회사 측은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문평제유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내규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과거보다도 더 가혹한 것이었다.
문평제유노동조합의 보고를 받은 원산노동연합회는 1929년 1월 13일 긴급집행위원회를 열어 8시간노동제 실시와 취업규칙개정 등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회사 측이 이를 수락하여 노조를 승인하고 단체협약에 응할 때까지 동맹파업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고, 1월 14일 오전 10시부터 파업에 들어갈 것을 발표하도록 문평제유노동조합과 문평운송노동조합에 지시하였다.
또한 원산노동연합회는 문평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전 원산부두노동자들에게 라이징 선 석유회사의 화물을 일체 취급하지 말도록 하였고,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전 조합원은 파업이 해결될 때까지 금주하고 매일 1인당 5전씩 걷어 파업자금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1월 14일 문평제유노동조합과 문평운송노동조합이 파업을 단행하고 특히 문평석유회사에서는 자동차운전수·취사부·수위까지도 파업에 가담하여 회사운영이 완전히 정지 상태에 빠졌다.
이와는 별도로 1929년 1월 3일 원산부두노동조합에서는 대성상회 외 9개 운수회사에 대해서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1월 10일에는 국제통운과 국제운수에 대해서도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던 차에 원산노동연합회로부터의 호소가 있자, 문평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라이징 선 석유회사 화물의 하역작업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원산에 있는 운수회사들과 일본인 자본가들의 집단인 원산상업회의소에서는 원산노동연합회가 언제나 조직력을 동원하여 임금인상 등 각종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서 투쟁하였으므로 기회만 있으면 이를 파괴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라, 그 해 1월 17일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토의하였다. 그들은 원산노동연합회를 타도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그 방법을 원산상업회의소에 일임하였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인천이나 중국의 안동에서 한국인 및 중국인 노동자들을 모집해 오도록 하였다.
한편, 원산유조업조합으로 하여금 그 해 1월 21일부로 원산노동연합회 소속 노동자를 일체 고용하지 않겠다는 통고문을 내도록 하였다. 그 결과 29일, 운수회사는 파업에 동조하는 노동자들에게 해고통지를 내고 문평석유회사에서도 파업에 가담해 결근하는 노동자는 퇴직으로 간주한다고 고시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원산노동연합회는 1월 22일 집행위원회를 열고 원산상업회의소에 대항하기 위해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그 날로 원산두량노동조합·해륙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날 결복노동조합(結卜勞動組合)과 운반노동조합이, 24일에는 원산중사조합과 원산제면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7일에는 양복직공조합이, 28일에는 우차부조합과 인쇄직공조합이, 2월 1일에는 양화직공조합이 파업에 가담함으로써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전체 노동자 2,200여 명이 총파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일본경찰은 우선 원산노동연합회 간부 7, 8명을 구속하고 400여 명의 일본인재향군인과 청년회·소방대원을 동원하여 시가지를 엄중히 경계하였다. 한편, 함흥보병대에서 약 300명의 군인을 차출하여 시가행진을 하게 함으로써 원산일대를 계엄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인천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를 데려다가 세관창고에 수용하고 부두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원산상업회의소에 대하여 사건해결을 위한 공동연설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하는 한편, 시민들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인쇄·제면·차량·양복·양화 등의 노동조합에 대하여 파업중지령을 하달하는 등 성의있는 조치를 취했으나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동연합회의 굴복을 고집하여 노동자들의 생활이 곤궁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리하여 파업은 장기화되어 1만 명이 넘는 노동자 가족들은 생활난에 빠져들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파업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하여 양식을 배급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청년단체·농민단체 등이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으며 일본·중국·프랑스·소련의 노동단체들의 격려와 후원이 있었다. 이상과 같은 노동자들의 성의있는 해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경찰은 원산노동연합회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를 계속 검속하였다.
한편, 원산상업회의소는 운수관계 자본가들로부터 어용노동단체 설립자금을 마련하고 폭력배를 모아서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동단체를 만들고자 광분하였다. 그리고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동연합회의 주의·강령 및 간부들을 바꾸는 조건으로 원산노동연합회를 인정하고 그 산하 노동자들을 취업시키라는 원산부윤의 조정안조차 일축하였다. 그리고 원산노동연합회에서 탈퇴하여 함남노동회에 가입하는 자만을 고용한다는 방침을 고수하였다.
총파업은 3월 중순이 되어도 해결되지 않았고, 원산노동연합회의 파업기금이 고갈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검속된 간부들의 뒤를 이은 새 지도부는 점차 투항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고, 원산상업회의소가 계속 노동자들에게 원산노동연합회를 탈퇴하여 함남노동회에 가입하면 취업시키겠다고 유혹하자 노동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이리하여 일부 노동자들이 원산노동연합회를 탈퇴하기 시작했고, 원산노동연합회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흥분한 노동자 수십 명이 4월 1일 오후 6시 함남노동회로 몰려가서 전선을 끊고 돌을 던지며 몽둥이를 휘둘러 함남노동회의 간부와 회원들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어서 노동자들은 4월 3일 새벽 2시 함남노동회 세포단체의 책임자인 김경문의 집을 습격하여 김경문 등 일행을 구타하여 중상을 입히고 함남노동회의 작업장을 습격하였다.
일본경찰은 즉시 수백 명의 경관을 출동시켜 원산노동연합회 소속 노동자 40여 명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이 일로 말미암아 많은 노동자가 체포·구금되었고, 마침내 파업은 폭력화하였다. 이에 원산경찰서장은 원산상업회의소에 종용하여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자들이 함남노동회를 통하지 않고도 고용될 수 있도록 수락하게 하였다.
한편, 투쟁의욕을 잃은 원산노동연합회 나머지 소수 간부들은 그 해 4월 6일 전체회원들의 무조건 자유취업을 결의하였고, 4월 8일에는 각 세포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대의원회에도 이 사실을 알려 4개월에 걸친 원산총파업은 노동자측의 패배로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원산노동연합회의 존재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시도한 원산상업회의소의 당초 목적이 그대로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노동자들의 커다란 승리로 끝난 셈이다. 파업의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원산총파업이 한국노동운동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며 그 뒤에도 그와 같이 장기간에 걸친 강인하고 조직적 파업은 없었다. 원산총파업은 한국노동자들의 굳은 단결과 평화적이며 합법적인 투쟁이 일제의 탄압하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전 민족에게 보여줌으로써 한국민족의 항일투쟁정신을 크게 고무하였다. 그리고 총파업에 대한 전국 각지로부터의 열렬한 성원은 원산총파업이 단순히 노동운동사에서뿐 아니라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획기적 사건임을 보여준다.
암태도 소작쟁의
1920년대 일제의 저미가 정책으로 지주의 수익이 감소함에 따라 지주측에서는 소작료를 증수하여 손실을 보충하려 하였고, 암태도(전남 신안군)에서도 7~8할의 소작료를 징수하였다. 고율 소작료에 시달리던 암태도의 소작인들은 1923년 9월 서태석(徐邰晳)의 주도로 '암태소작회' 를 결성하고, 지주 문재철에 대하여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문재철이 이를 묵살하자 소작회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불납동맹에 들어갔다. 경찰의 위협과 지주의 협박 ․회유 속에서 소작인들은 불납동맹을 계속하는 한편, 1924년 4월 면민대회를 열어 문재철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문씨측이 면민대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소작인을 습격하고, 면민대회의 결의를 무시하자 소작회는 전조선노농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소작문제를 호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자, 소작회는 5월 22일 수곡리에 있는 문재철 부친의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이를 저지하는 문씨측 청년들과 충돌하여 소작회 간부 13명이 검거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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