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H 운동

머리(head), 손(hand), 마음(heart), 건강(health)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머리글자(H)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들 단어의 의미를 각각 지(智·Head), 덕(德·Heart), 노(勞·Hands), 체(體·Health))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4H 운동은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시작돼 현재 세계 80개국에서 전개되고 있다.


 

2. 새마을 운동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며, 이의 실천을 통해 국가발전을 꾀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1970년 4월 22일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제창하였는데, 같은 해 5월 6일 구체적인 추진방안이 마련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71년부터 전국적 범위로 확대된 이 운동은 생활태도 혁신과 환경개선 및 소득증대를 통한 낙후된 농촌의 근대화를 취지로 하여 정부주도로 이루어졌다.

1. 전개 과정
(1) 농어촌
  환경정비사업을 첫 단계로 한 농어촌의 새마을운동은 지붕개량·주택개량·농로개설·마을도로확충·하천정비·전기화사업 등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면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동·이에 시멘트를 무상지급함으로써 각 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여, 볏짚지붕의 슬레이트 대체, 담장보수, 마을 진입로 정비 등이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1972년부터 주민지도자를 발굴, 훈련시킴으로써 낙후된 주민의 정신을 계도시켜 나갔고, 농어가의 소득증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 도시
  도시새마을운동은 10대 구심사업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법질서의 준수, 건전소비풍토 조성, 도시녹화, 뒷골목과 가로 정비,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 생활오물분리수거, 시장새마을운동 전개, 도시환경개선, 낙후지역개발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새마을운동 추진은 지역·부녀·공장·학교새마을운동 등으로 조직화되면서 점차 정부 주도를 탈피하였으며, 80년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설립과 함께 민간주도로 전환되었다.

2. 발전 단계
  1971∼73년까지는 기반조성단계로 자율실천의 기반구축과 새마을정신의 점화·확산이 주된 과제였다. 그리고 74∼76년까지는 자조발전단계로 경제난국 극복에 중점을 두었으며, 전국민 참여의 저변확대에 따라 도시와 농촌간 소득격차 해소, 새마을사업의 소득증대의 연계추진 등이 마련되었고, 도시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다.
  또 1977∼80년까지는 자립완성단계로 국력신장의 기층 확대, 농어촌 복지기반사업 확대 등을 추진하였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81년 이후 민주복지완성단계를 표방하며 민간주도화하였으나, 여러 가지 맹점을 노출시키면서 운동 자체도 상당히 위축되었다.

3. 투자 규모
  1971∼84년까지 새마을운동에 투입된 물량은 총 7조 2000억 원으로 연평균 5177억 원이었으며, 총액의 57%가 정부투자, 11%가 주민부담, 나머지 32%는 민간단체의 회사로 이루어졌다. 또 용도별 투자내역을 보면, 생산기반 22.2%, 소득증대 42.8%, 복지환경 27.5%, 정신계발 2.8%, 도시 및 공장새마을운동 4.7% 등으로 나타났다.

4. 성과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앞서 언급했던 점 외에도 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소득증대사업으로서는 영농의 과학화, 농가부업의 육성, 농산물가격보장, 새마을공장·새마을금고 육성, 농수산물 유통구조개선, 생산품 품질개선과 생산성 향상, 근로자 후생복지제도 및 시설확충 등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통체계하의 농촌을 단기간 내에 현대적인 것으로 변환하도록 충격을 가했다는 점이 특기할 성과라 할 것이다.

5. 문제점
  새마을운동의 가시적 성과는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였으나, 78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경제정책이 바뀌자 농축산물 가격하락, 돼지파동, 쌀수매가 동결 등이 겹쳤고, 내무부가 새마을사업의 중점을 농촌주택개량에 둠으로써 농가마다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어 탈농·이농이 속출하였다. 여기에 제5공화국이 들어서자 이 운동을 이용한 온갖 부정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새마을운동은 침체되었다.(출처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2. 우루과이 라운드(UR)

1986년 9월이 남아메리카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각료회의에서 시작된 GATT 의 8차 다국간 무역 협상.

GATT는 1947년부터 1979년까지 라운드라 불리는 다각적인 무역협상을 7차에 걸쳐 개최했다. 이 일련의 협상은 각국의 관세인하와 무역장벽의 철폐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86년 우루과이에서 시작된 8차 무역협상은 8년에 걸친 교섭 끝에 1994년 4월 모로코의 마라케시 각료회의로 종결했다. 각국이 국내 절차를 마친 후 1995년 1월 GATT는 세계무역기구(WTO)로 발족했다.

GATT의 최종협상이 된 우루과이라운드(UR)의 성과로는 다음 4가지가 주목된다. ① 세계무역기구의 설립과 체계적인 분쟁해결 절차 도입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보다 공고히 한 점 ② 산업보호를 위한 반(反)덤핑, 보조금,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등 무역조치의 운용·절차를 명확히 한 점 ③ 서비스·지적재산권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규칙을 도입한 점 ④ 무역조치에 관해 WTO 사무국에 통보·등록하는 등 투명도를 높인 점 등이다.

특히 1993년 말에 체결된 UR협상에서는 한국과 일본 등의 쌀에 대한 수입개방 특례조치인 UR 농산물 개방 특례 조치가 채택되었다. 이 협정초안에는 기준연도인 1986∼1988년 3년간의 수입량이 국내 소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3% 미만인 작물, 식량안보나 환경보호 등 비교역적 관심사항에 해당하는 작물, 수출보조금을 지원하지 않고 효과적인 생산 제한 조치를 취하는 작물 등의 조건에 맞는 농산물 품목에 대해 예외 없는 관세화 원칙에서 특례 조치를 두도록 했으며 특례기간(관세화 예외조치 기간)이 끝난 후에도 특례 조치를 계속할 경우에는 최소 수입량을 8%로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과의 쌀 개방 협상에서 10년간의 관세화 유예기간을 두며, 쌀의 첫해 최저 수입량을 1%로 하고 매년 0.25%씩 수입량을 늘려 5년째에는 2%로 하며, 다음 5년간은 매년 0.5%씩 수입량을 늘려 4%가 됐을 때 관세화 유예 연장 여부를 재협상한다는 데 합의해 UR협상에서 국민적 관심사였던 쌀 수입 개방 문제에 대해 협정 초안보다 느슨한 예외조치를 인정받았다.


3.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 약칭 WTO)

1994년 4월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열린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우루과이라운드(UR : 다자간 무역협상)’ 각료회의에서 설립된 세계무역추진 및 무역 분쟁 처리를 위한 기구. 약칭 WTO.

GATT를 대신하는 기구로 1995년 1월 발족. 상품 뿐만 아니라 서비스와 지적 소유권도 대상에 포함되며, 무역자유화 추진 및 그것을 위한 각종 규정의 강화, 무역·금융·재정 등에 관한 정책 조정 추진, 그리고 GATT에서 제한적으로 역할하던 무역재판소 기능의 강화 등을 임무로 한다. 그러나 환경 규제에 소극적인 국가의 제품을 차별적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미국 등의 주장과 저임금에 맞서기 위해 노동 조건에 관한 규정을 두어야 한다는 프랑스 등의 주장에 대해 개발 도상국들이 반발하고 있어 노동·환경 문제 등과 같은 현안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1995년 10월 시작된 기본 통신 서비스 협상은 1997년 2월 타결돼 1998년부터 각국 시장이 단계적 개방에 들어갔으며, 1997년 3월 정보 통신 부문의 관세 철폐를 위한 정보 기술 협정이 한국 등 40개국의 서명으로 7월부터 발효됐다. 또한 12월 개발도상국 금융 시장의 규제 철폐 및 자유화를 위한 금융 자유화 협정이 5년 만에 타결, 1999년부터 발효되었다.

조직으로 총회·각료회의·무역위원회·사무국 등이 있으며 분쟁 해결 기구와 무역 정책 검토 기구가 있다. 2003년 현재 회원국은 146개국이며,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5. 전태일의 삶과 죽음

1970년 11월 13일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서울 평화시장에서 분신 하였다. 이 사건은 우리 나라 경제 성장 과정에서 노동조건과 노동 환경이 얼마나 가혹했으며, 노동자의 처지가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6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태일은 2년 남짓한 짧은 학교 생활, 하루 한두 끼니 조차 챙기기 힘든 혹심한 가난, 취지과 실직을 거듭하는 부친의 폭음과 학대로 말미암아 대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대구로 오가며 밑바닥 생활을 해야 했다. 태일은 ‘덕수궁에서 구두 닦고, 저녁에는 신문 팔고, 밤1시,2시까지 경찰을 피해 다니며 조선 호텔 앞에서부터 미도파 백화점 앞과 국립 극장 앞, 명동 뒷 골목을 쓸며, 담배 꽁초를 주워 모아 생계를 유지하고, 잠은 덕수궁의 대한문, 지금의 수위실에서 가마니를 덮고’ 자는 생활을 하였다. 

전태일이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로 첫 발을 디딘 것은 1964년 봄이었다. 그의 나의 16살 때, 그는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 밖에 안 되는 하루 품삯 50원을 받는 시다였다. 그는 이 곳에서 노동자들의 실상을 보고, 그들의 딱한 사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당시 전태일이 있었던 평화시장의 노동 시장은 일거리가 많은 때에는 하루 14~15시간 고된 일을 해야 했고, 쉬는 날은 한 달을 통틀어 2일인 경우가 많았으나, 그나마 잘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또한 1만명이 넘게 일하는 건물에 환기 시설이 하나도 없었으며, 바람도 잘 통하지 않고, 햇빛도 잘  들지 않았다. 남녀 구분도 없는 화장실 마저 턱없이 모자라 변소 앞에는 하루 내내 줄이 늘어져 있었다. 이렇게 형편 없는 작업 환경에서 5년 넘게 일한 여공이 직업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기적이라 할 지경이었다. 물론 이러한 작업 환경은 펴화 시장의 일만은 아니었으며, 70년대 노동자의 대부분이 이러한 작업 환경에서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화 시장 노동자가 된 전태일은 이 곳에서 봉제 노동자의 실상을 보고, 그들의 딱한 사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이때 태일이 발견한 책이 ‘근로 기준법’이라는 책이었다. 전태일은 밤마다 창동 천막집에서 어려운 한자 투성이인 이 책을 넘기며 탄식했다고 한다. “어머니, 대학생 아들 둔 친구 없어요? 내게도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는데...”하며 태일은 법조문을 읽고서 “이렇게  좋은 규정을 모르고 찍소리 못하고 살아 왔다니. 나는 참 바보였다.”고 한탄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바보라고 여기고, ‘바보회’라는 노동자들의 모임을 1969년 6월에 만들었다. 바보회는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을 개선하는데 힘썼다.  그러자 그는  위험 인물로 찍혀 평화시장 내에서 취직이 안되는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였다. 1970년 8월 9일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히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 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다시 평화 시장으로 돌아온 태일은 먼저 ‘바보회’ 회원을 모아 이름을 ‘삼동 친목회’로 바꾸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평화 시장 노동자가 얼마나 어려운 상태에 있는가를 조사하여 진정서를 노동청장에게 올렸다. 이것이 다음 날 신문에 나오게 되었는데, 여기서 큰 힘을 얻게 된 태일은 근로 조건을 개선하려고 더욱 노력하였다. 

  태일은 ‘삼동 친목회’가 평화 시장 앞 길에서 시위하기로 결의했던 11월 13일 자신의 목숨을 바쳐 노동자들의 참담한 처지를 알리는 운명의 날로 잡았다. 드디어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는 플래카드를 미리 출동한 경찰에 빼앗기자, 태일은 청계천변 평화 시장 앞길에서 이미 석유로 절여 놓았던 자신의 몸에 불길을 당겼다. 눈 깜작할 사이에 그의 몸은 불타기 시작하였다. 그는 불길에 휩싸인 채,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라고 외치다가 마침내 쓰러졌다. 옆에 있던 동료가 옷을 벗어 그의 몸에 붙은 불을 꺼 주자 얼마 안 있어 도저히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부르짖고는 이내 쓰러졌다.

태일은 병원에서 어머니 이소선씨에게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이 분신한 것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전태일의 죽음은 이후 민주 노조 운동의 물꼬를 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