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말하노라. 우리 태조 강헌대왕
(康獻大王)께서 하늘의 운수에 응하여 개국한 이래로, 안으로는 정치를 닦고 밖으로는 적을 물리쳐 우리 동토(東土)를 평안케 하니, 북쪽 변방의 야인
(野人)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하여 마치 개가 꼬리를 흔들 듯이 하면서 어여삐 여겨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로써 국경 안에 밥 짓는 연기가 서로 이어지고 사람과 가축이 들에 퍼졌으며 (싸움으로)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경보가 없어졌다.
'강헌대왕' 관련자료
'야인' 관련자료
태종
공정대왕
(恭定大王)께서 대통(大統)을 잇고 기업(基業)을 지키면서 포용해 주고 고루 덮어 주어서 다른 종족을 길들여 굴복시켜, 섬 오랑캐(島夷, 왜인)와 산 오랑캐(山戎, 만주의 여진족
)가 모두 복종하였다. 내가 부덕함으로 조종(祖宗)의 귀감을 이어 받들어 야인
을 기르고 대우함에 특별히 불쌍하게 여겨 때때로 그들의 굶주리고 궁핍함을 구제하였다.
'태종' 관련자료
'공정대왕' 관련자료
'여진족' 관련자료
'야인' 관련자료
근래에 파저강(婆猪江)
의 정성으로 모두 상국으로 돌려보냈는데, 야인들이 이것을 원망하고 분하게 여길 것을 어찌 뜻하였겠는가. (저들이) 우리 강토를 엿본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지금의 퉁자강(佟佳江)
근처에 사는 용주(龍住) 이만주(李滿住)가 명나라의 반적(叛賊) 양목답올(楊木答兀)과 결탁하여, 요동(遼東) 개원(開原) 방면의 사람들을 잡아 노비로 만들었다. 노비가 된 자들이 혹독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목숨을 보존하려고 우리나라로 도망하여 오는 것이 잇따라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나는 사대(事大)
'사대(事大)' 관련자료
선덕(宣德) 7년(1432, 세종
14) 11월에 이르러 국경이 공허한 틈에 강계(江界) 여연구자(閭延口子)에 돌입하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고 사람과 가축과 재산을 약탈하였으니, 베푼 은혜를 배반하고 극도로 흉악한 죄가 있어 죽임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속여 말하기를, “홀라온(忽刺溫)이 멀리 와서 도둑질하고 약탈한 사람[人口]과 마필을 빼앗아 잡아 두었다” 하며 조정을 속였다.
'세종' 관련자료
이미 적의 패악한 정세를 기록하여 명나라 천자에게 아뢰고, 올해 4월에 장수에 명하여 죄를 묻게 하며 동시에 길을 나누어 함께 진군하여 적의 소굴을 부수게 하였다. 오히려 싸움을 그치는 무(武)에 마음을 쓰고 죽이지 않는 인(仁)을 품어 여러 장수에게 시키기를, “저들이 만약 손을 들고 항복하거든 곧 항복을 받고, 특별히 위엄을 보이어 뉘우치고 두려워하게 하며, 보복을 가하여 죄 없는 사람까지 죽이지 못하게 하라. ” 하였다.
(그러나) 저들이 짐승 같은 성질을 고치지 않고 야만스러운 마음이 변함이 없어서 벌처럼 뭉치고 개미처럼 모여 감히 저항하였다. 이에 우리 군사가 곧 쳐들어가서 이르는 곳마다 승리하여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모두 500여 명이나 되었다. 죽음을 겨우 벗어나 넋이 나간 자들은 모두 달아나 흩어지거나 숨었으니 적의 무리가 평정되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병기(兵器)는 비록 어지러움을 구제하고 사나운 자를 베는 도구이기는 하나, 겨울과 여름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군사를 움직일 때가 아니다. 그러나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6월에 정벌한 것은 험윤(玁狁)
주나라 때 흉노의 명칭
의 세력이 몹시 왕성하였기 때문으로, 일이 위급한 경우에 닥치면 사람들이 (겨울과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일을) 폭정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어리석은 저 오랑캐가 지형이 험한 것만을 믿고 천리(天理)를 거역하여 내 변방 백성들을 침해하였으니, 저들의 화(禍)는 자초한 것이다. 내 어찌 노여워하지 않으랴. 출병(兵出)은 명분이 있어야 하고, 군사는 곧고 굳세어야 한다. 조종의 신령에 힘입어 군사들이 용감하고 민첩하게 전진하였으며, 의분을 품고 저들의 경계로 쳐들어갔다. 아, 깊숙한 소굴을 소탕하였으니 정히 추악한 적의 무리가 모두 사라질 때요, 국경을 숙청하였으니 한 번 수고하여 영원히 평안함을 거두었다. 중외에 포고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노라.
『동문선』권24 「교서」 정건주야인후파고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