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 감사
임담(林墰)이 치계하였다. “우리나라에 서원
(書院)을 세운 것이 가정(嘉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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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1566년까지 명나라 세종의 연호
연간에 시작되었는데, 맨 처음 창건된 것은 열 군데에 불과하였으니 모두 조정에 보고하고 향사(享祀)의 예전(禮典)을 밝게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력(萬曆)
1573~1620년까지 명 신종의 연호
이후에는, 사당을 세운 것이 해마다 더욱 많이 불어나서 고을마다 즐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폐단이 널리 퍼져 심지어 향사 논의마저 불공정해져, 벼슬이 높은 사람이면 향사하고, 세력 있는 집안사람이면 향사하여, 서로 앞다투어 제사지내려 하고 이것을 가지고 서로 자랑하며, 또 향사로 사사로이 명예를 세움으로써 서로서로 배척하고 훼방놓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선비들이 옛 성현의 도를 본받지 않고 세도(世道)가 날로 무너져서, 어진 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의리가 개인적인 파벌로 바뀌는데도 조정에서는 묻지도 않고 관리들은 금하지도 못해, 습속이 점점 투박해지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중국에서는 유학자 현인이나 이름난 신하 중 향사의 예전을 베풀기에 합당한 자에 대해서, 독학관(督學官)
에게 보고하고 다시 조정에 상주하여 허락을 얻어야만 허가를 해 주어서, 그들이 사적으로 서로 다투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런 폐단은 다른 도(道)에서도 모두 그러하니, 꼭 바로잡아야 합니다. 조정으로 하여금 여기에 관한 일을 성헌(成憲)으로 만들어서, 각 도 각 읍에서 이를 지키게 하소서”
학사(學事)를 감독하는 관리
이 자세히 조사하여 반드시 먼저 조정에 보고한 다음 사당을 세워서 향을 올려 제사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새로 사당을 짓는 일에 대해서는 한 도의 선비들이 함께 의논한 다음, 본관(本官)에 서장(書狀)을 바쳐 낱낱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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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담의 치계를 예조에 하달하니 예조 판서 이식(李植) 등이 답변하는 글을 썼다. “서원
을 설치하는 것은 당초에 학문을 하고 심신을 수양하는 선비들을 대우하기 위한 것이니, 사당을 세우고 높이 받들어 향을 올려 제사할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한 시대에 밝게 알려져서 기념할만한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선정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선비라는 사람들은 학문을 일삼지 않고, 제사의 대상이 된 사람은 적절치 않은 인물이기도 하여, 사원(祠院)은 많으나 유학은 더욱 침체되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지금 이 장계에서 논한 것이 실로 일리가 있으니, 지금부터 새로 창설하는 곳에 대해서는, 모두 예조에 보고하여 조정에서 함께 의논해서 공론
이 허가를 내린 다음에 짓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또 각 도의 사원에 대하여 일찍이 예조에서 공문(公文)을 보내서 물어 보았던 것은 향을 올려 제사지내고 있는 선현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였는데, 향촌 사람들이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서 많이 기피해 버리고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조사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도 또한 타당합니다. 다른 도의 감사
들에게도 모두 이 내용을 알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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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권45, 22년 8월 4일 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