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30일, 토, 맑음, 삼가다)
어제의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또 오늘은 금년 그믐날이므로 수업을 하지 않았다. 낮에 선생댁에 가서 신문을 읽다 저녁때 돌아왔다.
무엇을 가지고 한 해를 꿈결 속에 지냈다고 하는가. 시사의 변함이 황홀하여 꿈결 같음을 이르는 것이다.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푸트 공을 따라 서울에 돌아와 머무르기를 2년. 힘쓴 것은 영문·영어였고, 한 일은 다만 주상의 뜻을 푸트 공에게 전하고 또 푸트 공의 말을 주상께 전하는 것이었으며, 관계한 것은 외교와 통상 일반이었고, 바란 것은 나라가 태평하고 문명화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 아는 것은 짧고 학문은 단련되지 않아, 늘 푸트공과 같이 미국에 가서 공부하기를 바랐다. 까닭에 미국공사관에서 머물러 지내면서 시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동안 지내면서 관망하건대, 조정에는 기둥과 주춧돌처럼 중임을 맡은 신하가 없고, 인민에게는 떨쳐 일어서려는 바람이 없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닫아두었던 방문이 막 열리게 되자, 머뭇거리며 능히 활발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라고 하겠다. 더욱이 임금과 왕비가 성명(聖明)하여 여러 나라 문명과 기술의 취사(取捨)를 통촉하고, 군정·세무·기계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법을 많이 쫓고 있는 터이다. 다만 보필하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성공한 것이 없는 점이 한스러우나 오히려 부지런히 하여 마침내 바라는 바를 조금은 이루게 되었다. 또한 청인의 구속을 받기는 하였지만, 금년 가을 겨울이 되어서는 점차 그물을 벗어날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화당(開化黨)은 비록 수는 많지 않으나 김옥균
(金玉均)·홍영식
(洪英植)·박영효
(朴泳孝)·서재필
(徐載弼)·서광범(徐光範)은 문벌 좋은 집안 출신이어서 가히 큰 지도자가 될 만하였다. 더욱 약간의 시무(時務)에도 통달하고 있어서 나라에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었으며 그 수가 가히 하나의 당을 이룰 만하였다. 문견을 넓히고 알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기를 날로 달로 더하여 인민들이 밝은 것을 취하고 어두운 것을 버리는 보람을 볼 수 있게 되었다(가을 겨울 사이에 인민들이 검은 옷을 많이 입게 되었다. 이로 볼 때 또한 인민들이 실리를 취하여 밝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일반의 방향을 가히 엿볼 수 있겠다). 그러나 4~5인이 개화의 총도자(總導者)가 되어 갑자기 격패(激悖)한 일을 저질러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청인들로부터 억압과 능멸을 받음이 전날보다 배는 더하게 되고, 이른바 개화에 관한 말을 땅에 발라 흔적도 없게 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전에는 인민이 비록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시비를 가리려 하지는 않았다. 개화당을 꾸짖는 자도 많이 있었으나 오히려 개화가 이롭다는 것을 말하면 듣는 사람들도 감히 크게 꺾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변을 겪은 뒤부터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말하기를 “소위 개화당이라고 하는 것은 충의를 모르고 외인과 연결하여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하였다”고 하고 있다. 어찌 개화에 주목한 사람 가운데 마음속에 이와 같은 의사를 품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패격(悖激)하여 일을 그르친 4~5인이 곧 전날의 개화당 인물인 까닭에 세인들은 다 외국과 교류하려는 사람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賣國之賊)’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조정에서 채용하고 있는 것은 좀먹고 썩은 초유(草儒)에 지나지 못하여 입안 가득히 고담(高談)을 늘어놓으나 마음속으로는 사사로운 이익만을 꾀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세상에 혹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짐짓 완고한 체하고 만다. 이리하여 2~3인의 간노(奸奴)들이 밖으로 오랑캐의 세력을 끼고 군상(君上)을 위협하여 나라 일을 날로 그르치고 있다. 한스럽다. 3~4인의 패악한 거사가.
미국 공사가 서울에 주차(駐箚)한 이래 나라의 운수가 비틀거려 성패가 정하여지지 않은데다가 변란이 있는 뒤부터 여러 번 실패하고 위험을 겪었으니 참으로 나라를 위하여 통탄할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 나와 같은 서생은 학문이 아직 숙달하지 못하여 국사를 평론하는 것이 분수에 맞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두 해 꿈결 속에 지나는 동안에 본 바가 위와 같은 것이다.
다만 상하이에서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진실 충후(忠厚)하리라. 갑신년(甲申年)에 전후의 뜻에 맞지 않았던 일을 떼어 내어 넓은 바다로 띄워 버리고 단지 조심하고 신의 있고 무사(無邪)함으로써 하늘의 복을 빌어야겠다. 학문이 성취되면 서울로 돌아가 근친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성군(聖君)을 보필할 것이다. 오는 새해로부터는 만사가 태평하고 나라가 평안하기를 원하고 빌 뿐이다.
무엇을 가지고 한 해를 꿈결 속에 지냈다고 하는가. 시사의 변함이 황홀하여 꿈결 같음을 이르는 것이다.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푸트 공을 따라 서울에 돌아와 머무르기를 2년. 힘쓴 것은 영문·영어였고, 한 일은 다만 주상의 뜻을 푸트 공에게 전하고 또 푸트 공의 말을 주상께 전하는 것이었으며, 관계한 것은 외교와 통상 일반이었고, 바란 것은 나라가 태평하고 문명화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 아는 것은 짧고 학문은 단련되지 않아, 늘 푸트공과 같이 미국에 가서 공부하기를 바랐다. 까닭에 미국공사관에서 머물러 지내면서 시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동안 지내면서 관망하건대, 조정에는 기둥과 주춧돌처럼 중임을 맡은 신하가 없고, 인민에게는 떨쳐 일어서려는 바람이 없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닫아두었던 방문이 막 열리게 되자, 머뭇거리며 능히 활발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라고 하겠다. 더욱이 임금과 왕비가 성명(聖明)하여 여러 나라 문명과 기술의 취사(取捨)를 통촉하고, 군정·세무·기계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법을 많이 쫓고 있는 터이다. 다만 보필하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성공한 것이 없는 점이 한스러우나 오히려 부지런히 하여 마침내 바라는 바를 조금은 이루게 되었다. 또한 청인의 구속을 받기는 하였지만, 금년 가을 겨울이 되어서는 점차 그물을 벗어날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화당(開化黨)은 비록 수는 많지 않으나 김옥균
'김옥균' 관련자료
'홍영식' 관련자료
'박영효' 관련자료
'서재필' 관련자료
전에는 인민이 비록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시비를 가리려 하지는 않았다. 개화당을 꾸짖는 자도 많이 있었으나 오히려 개화가 이롭다는 것을 말하면 듣는 사람들도 감히 크게 꺾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변을 겪은 뒤부터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말하기를 “소위 개화당이라고 하는 것은 충의를 모르고 외인과 연결하여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하였다”고 하고 있다. 어찌 개화에 주목한 사람 가운데 마음속에 이와 같은 의사를 품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패격(悖激)하여 일을 그르친 4~5인이 곧 전날의 개화당 인물인 까닭에 세인들은 다 외국과 교류하려는 사람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賣國之賊)’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조정에서 채용하고 있는 것은 좀먹고 썩은 초유(草儒)에 지나지 못하여 입안 가득히 고담(高談)을 늘어놓으나 마음속으로는 사사로운 이익만을 꾀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세상에 혹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짐짓 완고한 체하고 만다. 이리하여 2~3인의 간노(奸奴)들이 밖으로 오랑캐의 세력을 끼고 군상(君上)을 위협하여 나라 일을 날로 그르치고 있다. 한스럽다. 3~4인의 패악한 거사가.
미국 공사가 서울에 주차(駐箚)한 이래 나라의 운수가 비틀거려 성패가 정하여지지 않은데다가 변란이 있는 뒤부터 여러 번 실패하고 위험을 겪었으니 참으로 나라를 위하여 통탄할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 나와 같은 서생은 학문이 아직 숙달하지 못하여 국사를 평론하는 것이 분수에 맞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두 해 꿈결 속에 지나는 동안에 본 바가 위와 같은 것이다.
다만 상하이에서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진실 충후(忠厚)하리라. 갑신년(甲申年)에 전후의 뜻에 맞지 않았던 일을 떼어 내어 넓은 바다로 띄워 버리고 단지 조심하고 신의 있고 무사(無邪)함으로써 하늘의 복을 빌어야겠다. 학문이 성취되면 서울로 돌아가 근친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성군(聖君)을 보필할 것이다. 오는 새해로부터는 만사가 태평하고 나라가 평안하기를 원하고 빌 뿐이다.
『윤치호 일기』, 1885년 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