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신문에서 선택해서 번역함) 원주는 교통이 불편하니 큰일을 도모하는데 도저히 적합하지 못함으로 작년 12월에 그곳을 떠나서 양주로 향하였다. 양주에 모여서 각 부서(군제)를 정할 때 이인영은 십삽도 의병 총대장이 되고 허위는 군사장이 되어 전투 계획 수립을 맡았으며, 각 군의 대장과 대호를 정하니 관동창의대장은 민긍호, 호서창의대장은 이강년, 교남창의대장은 박정빈, 경기·황해 양도진동창의대장은 권의희, 관서창의대장은 방인관, 관북창의대장은 정봉준이 맡았다. 그리하여 군사의 사기가 고동하여 경성으로 향하는 명령을 내리니 그 목적은 경성에 들어가서 통감부를 타격하고 굴욕적인 항복을 이끌어내며 종래의 소위 신협약 등을 파기하는 대대적인 활약을 기도하였다. 우선 심복을 보내서 경성에 잠입해서 각국 영사관을 방문하고 통문 한 장씩을 전달하였으니, 그 내용에는 개략적으로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마주한 현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또 의병은 순연한 애국령단이니 열강도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식하며 또 정의인도를 주장하는 나라를 돕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군사장은 이미 군비를 신속하게 정돈해서 한 방울의 물이 새는 틈도 없게 하였다. 이에 전군에 명령을 내려서 일제히 진군을 재촉해서 동대문 밖으로 접근하자, 대군은 장사진의 형태로 천천히 나아가고 300명의 병사를 인솔해서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바깥 30리까지 이르러서는 전군이 모이기를 기다린 후에야 경성으로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으나 전군이 집합하기로 정한 때가 어긋나고 일본군이 엄습하였다. 몇 시간을 지극히 맹렬하게 싸웠지만 후방의 부대가 오지 않았기에 퇴진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