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
하기를, “신 등이 엎드려 살펴보건대, 언문
(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시어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용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지만,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어서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드려 성상께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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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랐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만나서 언문
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
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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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로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지만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경우가 없고, 오직 몽골·서하(西夏)·여진
(女眞)·일본(日本)과 티벳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지만,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중화의 가르침을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이적에게 변화당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노라’라 하였고, 역대 중국 조정에서 모두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고 하여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
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은 이른바 소합향(蘇合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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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나무 과에서 추출하는 침출액으로 매우 귀한 약재
을 버리고 쇠똥구리의 환약[螗螂丸]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겠습니까. 1. 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비루한 사투리이지만,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려서 어조사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胥吏)나 복예(僕隷)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후에나 이두를 쓸 수 있게 되니,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한자를 써야 의사를 통하게 되어, 이두 떄문에 한자를 알게 되는 자가 많사오니, 학문을 흥기하는 데에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고 살았던 [結繩]
을 빌려서 한때의 사용에 보탤 수 괜찮지만 올바른 논의를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
을 시행하여 임시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보다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장부를 적거나 모임의 일을 기록하는 등의 일에 방해되지 않는데,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비루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십니까. 만약에 언문
을 시행하면 관리인 자가 오로지 언문
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관리들이 둘로 나누어질 것이옵니다. 만일 관리 된 자가 언문
을 배워 출세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
으로도 족히 관리가 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문자를 알지못하는 시대에 노끈을 이용하여 표기하던 방식
세대라면 우선 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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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수십 년 후에는 한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질 것입니다. 비록 언문
으로 능히 관리의 일을 집행한다 하더라도, 성인의 문자를 알지 못하면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니, 언문
에만 능숙하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문을 숭상하는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 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한자로 쓰여진다 하더라도 유식한 사람은 비루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
은 한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입말을 쓴 것이 아닙니까. 가령 언문
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하면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도를 발전시키려는[變魯至道]1)
뜻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입니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걱정거리인데, 이번의 언문
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해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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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로지도(變魯至道) : 중국 춘추시대 선왕(先王)의 유풍만 있고, 그것이 행하여지지 않던 노(魯)나라를 변화시켜 도(道)에 이르게 한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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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전 우려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형살(刑殺)에 대한 옥사(獄辭) 같은 것을 이두·한자로 쓴다면, 글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
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지만,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억울한 일이 심히 많습니다. 가령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읽을 줄 아는 자가 친히 법률 문서를 읽고서 그게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거짓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소송문서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비록 언문
을 쓴다 할지라도 지금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형벌을 내리고 감옥에 가두는 것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은 감옥의 관리가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가 같고 같지 않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언문
을 가지고 처벌을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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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릇 제도를 경영하는데는 가깝고 빠른 것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데, 최근에는 국가가 모두 빨리 이루는 것만 힘쓰니, 정치를 제대로 이루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만일에 언문
을 할 수 없이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고,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심사숙고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황제와 왕들에게 답해도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과 합치시켜봐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 성인이 나타나도 부끄러움 없을 만한 연후라야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명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
을 부회(附會)하여 공장
(工匠) 수십 명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
(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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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
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닌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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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몸을 높여 부르는 말
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십니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 가지 놀잇감[玩好]은 대개 사람의 의지와 기백(志氣)을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그것만 지나치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깊이 몰입(潛心)하시어 더욱 그 도달하지 못한 부분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
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하물며 만약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함이 없는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큰 손해가 됩니다.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대죄(待罪) 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침묵할 수 없어서 삼가 간절한 마음으로 성총을 번거롭게 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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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상소
(疏)를 보고 최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발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래의 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
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틀렸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상소
(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매사냥을 즐겨 다니는 것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나라의 여러 일(庶務)을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조그마한 일일지라도 참여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언문
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그 일을 맡기겠느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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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고 하셨으나, 소리에 의거하고 풀이에 의거한 것이라 한문의 어조사일 뿐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언문
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쓰고 그 소리의 해석까지 변경한데다 글자의 형태가 맞지 않습니다. 또 언문을 두고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했던 것은 다만 표현상 말 한 것일 뿐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닙니다. 세자께선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여하여 결정하셔야 하는 분인데, 급하지 않은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십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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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이 말했다 ‘지난번에 김문(金汶)이 ‘언문
을 제작해도 괜찮습니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안 된다고 한다. 이번에 정창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도 충신·효자·열녀
가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이 선행을 하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꼭 언문
으로 번역한다고 사람이 모두 본받겠습니까.’ 이런 말들이 어떻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 곳에도 쓸데없는 어리석은 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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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말은 일전에 세종
이 정창손에게 “내가 만일 언문
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
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해서 정창손이 대꾸하였기 때문에 다시 세종
이 이와 같이 또다시 대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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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너의들을 죄 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상소
문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꿔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였다. 이에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직제학 신석조(辛碩祖), 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 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 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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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바꾸어 올린 이유를 국문하여 알리라” 하였다.
『세종실록』권103, 26년 2월 20일 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