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식목도감의 변질
식목도감과 도병마사는 국내외의 중요사를 의논 결정하는 재추들의 회의기관으로 양자는 동등한 위치로 병립하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폈던 것처럼 식목도감은 도병마사에 비하여 그 관원 구성에 있어서 약간이나마 격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실제 그 활동에 있어서도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무신란 전에 있어서 도병마사의 활동 기사가 상당히 많고 그것이 자못 권력기구였음을 나타내는 반면 식목도감은 그 활동도 미미하여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제 같은 재추로 구성된 두 회의기관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은 반드시 이르게 될 사실이었다.
도병마사는 고종 때부터 「都堂」의 칭을 갖고 종래의 대외적인 국방문제를 넘어서 모든 국정의 중심 기관으로 대두되었다. 더욱이 충렬왕조에 도병마사 가 도평의사사로 승격하면서 그 지위는 한결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도병마사(도평의사사)의 都堂化는 식목도감으로 하여금 그에 종속하는 관계로 격하케 되었다. 이제는 식목도감이 단순히 식목녹사가 일을 처리하는데 그치는 무력기구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식목도감이 일약 그 지위를 격상시킨 일대 변동이 일어났다. 충선왕이 식목도감의 구성과 기능을 확대 강화시킨 것이다. 즉 충선왕 2년(1310)에 식목도감으로 하여금 나라의 중대사를 관장케 하고 僉議政丞·判三司事·密直使·僉議贊成事·三司右左使·僉議評理 이상으로 판사를 삼고 知密直 이하로 사를 삼게 개정하였다.0147) 이것은 재신·추신·삼사의 재상으로 하며금 식목도감의 판사·사로 삼아 국가의 중대사를 관장케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식목도감의 기능과 구성은 바로 도당인 도평의사사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면 엄연히 도평의사사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구태어 다시 식목도감으로 하여금 똑같은 기능을 갖게끔 격상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때 도평의사사에 대신하여 식목도감이 최고 정무기관인 도당으로 바뀌었다고 하겠다. 실제로≪高麗史≫를 보면 충선왕 2년부터 충숙왕 후년까지 식목도감이 도당과 같이 국가의 중대사를 관장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 반면 도평의사사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이 기간 동안 도평의사사에 대신하여 식목도감이 도당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제현은 그의≪櫟翁稗說≫에서 도평의사사를 또한 식목도감사라고도 불렀다고 하였다.≪櫟翁稗說≫의 내용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高麗史≫에 인용되었는데≪高麗史≫편찬자는 도평의사사가 곧 식목도감이라고 한데서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관지에서 양자를 각각 별개의 항목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이 ‘或稱爲式目都監使’의 구절을 빼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의 학자들도 이것은 이제현의 착오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현은 바로 충선왕·충숙왕 때 재상직을 역임하여 직접 도평의사사나 식목도감의 회의원이 되었고, 또 당대의 유명한 문인으로 유식층이었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킬 리가 만무하다.0148) 실제로 충선∼충숙왕조에는 식목도감이 도평의사사를 대신하였던 까닭에 그렇게 서술하였다고 믿는다.
그러면 엄연히 국가 중대사를 관장하는 도평의사사가 존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어 충선왕이 새삼스레 식목도감으로 하여금 도당이 되게끔 개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역시 충선왕의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충선왕 2년(1310) 식목도감의 기능이 강화될 때 密直司를 2품 관부로 승격하여 僉議府와 함께 양부를 칭하게 하였다. 본국을 떠나 멀리 원에 머물고 있었던 충선왕으로서는 대립적인 충렬왕파의 구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이것이 옛 첨의부와 도평의사사 중심체제에서 양부와 식목도감으로의 권력 이동을 단행한 이유로 생각된다. 충선왕이 식목도감을 개편한 직후 도당의 구성원인 양부·삼사의 재상을 새로 임명하고 또 식목도감도 새로운 충선왕의 측근으로 임명한 것은 이를 표시하는 것이다.0149)
충선∼충숙왕대에 도당으로 행세한 식목도감은 얼마 후 다시 도평의사사에게 그 자리를 되돌려 주게 되었다. 충목왕 원년(1345)에는 다시 도평의사사가 도당으로서 기능한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0150) 충숙왕 12년(1325)에 식목도감이 나오고 충목왕 원년에 도평의사사가 보이므로 그 사이에 도당이 식목도감에서 도평의사사로 환원되었다고 하겠다. 忠惠王 후 3년에 이제현이 쓴≪櫟翁稗說≫에서 “改爲都評議使 或稱爲式目都監使”라고 한 문맥을 보면 이미 이 때는 식목도감 시기가 지난 것 같다. 따라서 적어도 충혜왕 후 2년 이전에 식목도감 은 도평의사사에게 도당의 자리를 넘겼다고 보여진다.
도평의사사가 도당으로 환원된 이후에도 식목도감 자체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것은 고려 말에도 그대로 식목녹사가 존재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기능이 다시 충선왕 2년 이전처럼 무려한 기구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식목도감은 고려 말 도평의사사의 강화에 비례하여 보다 약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식목도감이 재추들의 법제 회의기관으로서의 기능은 보이지 않고 다만 식목녹사만 존재하여 일을 보는 무력한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0147) | ≪高麗史節要≫권 23, 충선왕 2년 8월. 이 내용은≪高麗史≫百官志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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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8) | 이제현이≪樂翁裨說≫을 저술한 것은 忠惠王 복위 3년(1342), 그가 56세가 되던 해이다. |
0149) | 충선왕은 3년 7월 元에 있으면서 式目錄事 李桂英을 본국에 보내어 傳旨케 한 것은 측근으로 식목녹사를 삼은 것을 뜻한다. |
0150) | 忠穆王 원년의 整理都監狀에는 行省이 외방의 公事를 行移할 때는 도평의사사에 보고하면 도평의사사는 諸道存撫使·按察使에 移文하는 것이 원칙이라 하여, 전의 도당의 지위로 환원되었음을 보여준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