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서적의 수집과 편찬
정조는 동궁시절부터 서적수집에 관심이 깊었다. 그는 그 시기 이미 전각을 짓고 국내외의 도서를 수집하였다. 즉위한 뒤인 정조 원년 2월 연경에서≪古今圖書集成≫5천여 권을 구입하였다. 원래는≪四庫全書≫를 구입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사고전서≫의 저본이었던≪고금도서집성≫으로 대신하였다. 또 중국에서 도서구입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內閣訪書錄≫이라는 도서목록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옛 홍문관 및 강화행궁의 소장본을 옮겨 왔으며 명나라 조정이 주었던 여러 책을 모으고 국내의 희귀본을 규장각 각신을 통해 구입하였다. 이리하여 규장각은 장서가 3만여 권이나 되었다.
장서 3만여 권 가운데 東本(조선본)이 1만여 권이고 나머지는 華本(중국본)이었다. 규장각의 서고는 奉謨堂·書香閣(移安閣)·閱古觀·皆有窩·西庫 등 5곳이었는데 봉모당과 서향각에는 역대 군주의 어제·어진·어필 등을 보관하고 열고관과 개유와에 중국본이 있고 조선본은 서고에 있었다. 이 밖의 강화도의 외규장각에는 어제·어필·어진 외에 왕실의 의궤를 보관하였다. 이 규장각도서에 대해 정조는 서명응에게 목록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서목록이 바로≪奎章總目≫이며 정조 5년(1781) 6월에 완성되었다.380) 규장각의 장서는 각신들이 열람하고 관외로 대출도 가능하였다.
한편 규장각에서는 서적의 편찬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우선 규장각의 각신은 사관을 겸하였으므로 역사서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직제학은 수찬관을 겸하고 직각·대교는 품계에 따라 編修·記注·記事官을 겸하였다. 규장각의 각신이 역사서의 편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정조 5년 7월의≪國朝寶鑑≫을 편찬하라는 지시를 받으면서부터이다. 이것은 규장각에 역대 군주의 어제·어서 등 보감편찬의 중요 자료가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381)≪국조보감≫편찬 지시는≪영조실록≫과≪수정경종실록≫의 완성을 바로 뒤이은 것으로≪국조보감≫편찬은 실록 못지 않게 중시되었다.
또한 규장각의 檢書官들은≪奎章全韻≫·≪武藝圖譜通志≫·≪秋官志≫·≪大典通編≫·≪全韻玉篇≫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 밖의 규장각에서는≪文苑黼黻≫·≪同文彙考≫·≪五倫行實≫등을 출간하였고≪八子百選≫·≪朱書百選≫·≪五經百選≫의 편찬에는 국왕이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규장각을 통한 이런 서적의 편찬은 자신의 정치적·학문적 입장과 관련된 것으로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입장으로 확장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또 정조는 동궁시절부터 활자의 주조사업에 관심이 깊어 영조 48년(1772) 이미 임진자를 주조하였다. 즉위한 뒤 정조는 정유자(원년), 생생자(16년), 정리자(19년) 등을 주조하였다. 이 사업에는 규장각이 직접·간접으로 간여하였다. 정유자의 주조는 뒤에 규장각의 직제학이 된 서명응이 정조 원년 평안감사일 때 국왕의 명에 의해 주조한 것으로 정유자 15만자는 규장각 내각에 수장되었다. 생생자는 직접 규장각에 명하여 만든 것이다. 또 정리자의 경우 생생자를 글자본으로 한 것인데 규장각 직제학 李晩秀, 규장각 원임직각 尹行恁이 감독하여 주조하였다. 또 주자소는 정조 24년 확장되었는데 이 역시 직제학 이만수의 청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실질적으로 정조 때에는 경연관의 임무를 규장각의 각신이 대신하였다. 정조는 유교경전과 역사의 토론만이 아니라 민생의 고통과 정치의 득실까지도 각신의 의견을 듣고자 하였다.382) 이것은 정치적 의미가 큰 것이지만 경전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하였으므로 수준 높은 학술적 논의의 성격을 띠었다.
규장각의 각신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정조 5년부터 춘추관원을 겸하여 직제학은 수찬관, 직각과 대교는 품계에 따라 편수·기주·기사관을 겸직하였다. 이렇게 사관을 겸직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맡는 것이었다. 규장각 자체에서 매일의 업무를 기록하여 內閣日歷이라 하였다. 규장각 외의 일도 규장각에 관련되는 사항은 승정원에서 규장각에 송달하였다. 아울러≪日省錄≫의 기록도 규장각의 각신이 관장하였다. 사관의 임무는 깊은 학식을 토대로 하고 역사서의 편찬의 임무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이 역시 학술적 의미가 있었다.
규장각의 임무 가운데에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주로 국내의 의전행사·제사·조문 등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특히 학술과 관련되는 것은 서원의 제사이었다. 이 때에 지방의 유자·신하들에게 유학과 도를 중시하는 윤음을 전달하기도 하며, 제사 후 각신이 주도하여 그 지방의 유생을 대상으로 시험을 실시하여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기도 하였다.
규장각은 왕립학술원이자 왕립도서관·출판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규장각 초계문신이 벌이는 학술토의의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토론과정에서 매우 신축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정조 자신이 정통주자학과는 다른 학문적 경향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정조는 이런 교육을 통해 유능한 연소신료를 자신의 생각에 맞도록 재교육해 이들을 자신의 개혁정치의 주체세력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정조의 탕평정책은 단지 각 당색의 사람들을 고루 쓰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념에 맞도록 개조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이렇게 되어야 진정한 국왕 중심의 탕평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실학 등 당시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 정부 쪽으로 어느 정도 수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을 위해서는 기초적인 준비가 필요하였고 그것이 바로 도서관의 준비였다. 여기에는 중국본 및 조선본 중요도서 수만권이 수집되었다. 이것은 학문적 연구의 수준을 크게 높였다. 丁若鏞 같은 대학자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젊은 시절 규장각에서의 교육과 광범위한 문헌을 섭렵할 수 있었던 데 힘입은 바가 컸으며, 徐有榘의 경우도 그의 학문전통이 규장각과 연결되어 있다. 한편 규장각의 학술활동의 결과에 따라 출판된 서적은 중국과 우리의 문화를 높은 수준에서 정리하는 동시에 현실정치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趙誠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