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실학사상의 특성
조선 후기 실학사상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시작된 195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학사상의 개념은 다양하게 규정되어 왔다. 일부 연구자들은 실학을 經世學의 일종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근대지향적 사상’이나, ‘탈성리학적 사상’으로 규정하려 했다.393) 또한 일부의 연구자들은 실학의 범위를 북학사상만으로 제한하여 부르기를 제안했다.394) 이처럼 실학사상의 특성 내지는 개념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됨으로 인해서 실학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들 가운데 먼저 ‘탈성리학적 사상’이라는 규정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의 특성을 살펴보겠다.395)
탈성리학적 사상은 朱子註를 유일한 근거로 하여 유교경전을 해석해 왔던 조선성리학의 관행을 거부하고, 경전의 해석에 새 기준을 모색하는 사상경향을 총칭한다. 그리고 조선 후기 사회에서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는 사상을 실학으로 규정했다. 이 견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주자 내지 주자학에 대한 조선 후기 실학자의 태도를 검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실학자들이 남긴 주자나 주자학에 관한 언급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유형원은 주자의 견해를 ‘氣强理弱’이라고 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주자를 크게 존신하고 있었다.396) 이익도 “程朱가 孟子 이전에 있었다면 반드시 성인으로 지목되었을 것이다”라고397) 말할 정도로 주자에 대한 존숭을 지속하고 있었다. 홍대용도 “주자학은 中正하여 편벽되지 않으니, 참으로 孔孟의 正脈이다”라고 말하여398) 주자학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 주었다.
정약용도 “주자는 六經을 깊이 연구하여 진위를 판별하고 四書를 드러내어 심오한 뜻을 闡發했다”고 말하며 주자의 학적 권위를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399) 또한 그는≪春秋≫의 해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자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역대 선유의 논의를 살피건대 주자의 설만이 참으로 확실하고 평정하다.≪朱子語類≫에 실린 천만 가지 말마디 모두가 要諦에 들어맞으니 내가 무엇을 덧붙이겠는가(丁若鏞,≪與猶堂全書≫ 1-12권, 詩文集, 春秋考徵序).
이러한 언급들을 통해서 볼 때 실학사상은 주자학을 굳이 배격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학자들의 사상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여 출발했고, 그들의 사고에서 부분적으로는 성리학적 사고와 새로운 사고들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다.400) 그들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개혁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이론이라면 주자를 비롯해서 누구의 이론이라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401)
그러나 실학자들은 주자를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아니했지만, 유학의 해석상 적용되어 오던 주자 유일기준을 거부하면서 주자설에 대한 맹종이 가지는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주자설에 대한 맹종의 거부는 허목이나 이수광 단계에서부터 이미 드러난 일이었다. 이 점은 유형원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자학의 왕도정치론을 극복하고 원초유학으로 회귀해 가는 과정에서 주자학의 理氣人性論을 극복했다.402) 이익은 주자성리학의 연장에만 머물지 않고 이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403) 홍대용은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그 인간론의 전개에 있어서도 자신이 속한 洛論系의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同論을 주장했다.404) 박지원의 철학에서 드러나는 특징도 주자 유일기준에 대한 반발했고 인식론에 있어서 자신의 새로운 주장을 제시했다.405)
이 점은 정약용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정약용은 성리학의 氣質之性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기질을 선천적 제약으로 해석했던 성리학의 입장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天은 인간의 마음에 자주권을 부여해 주었다고 했고, 이로써 인간은 그 자아의 주체적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규정되었다.406) 이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실학자들은 朱子註를 기준으로 한 성리학의 유학 해석방법을 벗어나서 새로운 철학을 구성해 갔다.
실학자들은 주자를 존숭하기는 했지만 朱子集註에 맹종하기를 거부하고 선택적 입장에서 주자의 가르침까지 객관화하여 이를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주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실학적 사유의 본령이었고, 이를 탈성리학적 현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탈성리학적 현상은 실학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여러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탈성리학적 경향은 주자성리학에 대한 비판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실학을 탈성리학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출현했던 이른바 탈성리학으로 일컬어지는 사상들은 상당히 다양한 성격을 띠고 있다. 주자 유일기준에 입각한 성리학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학문사상의 경향 중에는 유학의 범위에 드는 陽明學이나 訓詁學·詞章學 등이 있고 道家思想 등 유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사상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요소를 가진 사상을 탈성리학이라는 한 가지 측면을 기준으로 하여 실학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난점이 따른다. 그렇게 할 경우에는 그 사상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실학이란 용어에도 개념적 다양성이나 모호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탈성리학이라는 소극적 개념을 구사하여 한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는 적극적이고 명확한 사상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따른다.
그러므로 탈성리학적 사상 일반을 실학으로 규정하기보다는 탈성리학적 사상 가운데 자신의 고유한 논리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특정 사상만을 분리해 내야 한다. 학술용어는 그 개념이 명확해야 하며, 적용범위가 분명히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학사상은 조선성리학의 학문풍토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던 사상 가운데 선진유학 내지 원초유학의 입장에서 제기된 王政論 혹은 王道政治論으로 제한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407)
실학자들은 자신의 왕도정치론이 현실사회에 시행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중세 사회 해체기에 처하여 국가재조론의 입장에서 왕도의 강화와 실천을 주장했다. 그들은 이 주장을 통해 당시의 현실사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은 바로 이 측면에서 볼 때 제한적 의미에서나마 현실참여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실학사상을 실천성이 결여된 이념이었다거나 중세체제의 단순한 유지 강화론으로만 볼 수는 없다.
요컨대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즉자적 사상의 형태로 실학사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실학사상은 유학의 해석에 있어서 주자설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기를 거부한 탈성리학적 사상으로서, 선진유학 내지는 원초유학에 입각하여 왕도정치론 혹은 왕정론에 기반을 두고 변법적 개혁을 추진하던 國家再造의 사상이었다. 그리고 실학자는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원초유학의 이상형으로 제시되고 있는 왕도정치의 政論에 따라 古法과 古制를 조선 후기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사회에 구현하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실학파는 실학자 상호간에 있어서 직접적인 유대나 연결관계와는 큰 상관없이 조선 후기의 지적 운동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경향성을 공유했던 학인들의 무리를 뜻한다.
이 실학파에 속하는 학인으로는 유형원을 비롯하여 李瀷을 거쳐 홍대용이나 정약용 등 흔히 북학파 사상가로 불리는 일단의 인물들을 모두 포괄하게 된다. 19세기 중엽 헌종대에 활동했던 이규경이나 최한기의 경우에도 실학자의 범위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393) | 千寬宇,<韓國實學思想史>(≪韓國文化史大系≫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70), 967쪽. 尹絲淳,<탈성리학적 실학>(≪한국유학사상론≫, 예문서원, 1997), 36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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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 | 池斗煥, 앞의 글, 146쪽. |
395) | 實學의 개념과 관련하여 제시되어 왔던 ‘經世論’·‘近代志向’·‘北學’ 등에 관한 견해는 이 글 3)-(1) ‘연구의 전개과정에 대한 검토’에서 약술하겠다. |
396) | 金泰永,<조선 후기 實學에서의 현실과 이성>(≪韓國思想史方法論≫, 도서출판 소화, 1997), 233쪽. |
397) | 李 瀷,≪星湖僿說≫권 17, 程朱聖人. |
398) | 洪大容,≪湛軒書≫외집 3, 杭傳尺牘 乾淨錄後語. |
399) | 丁若鏞,≪與猶堂全書≫1-11, 詩文集, 五學論 一. |
400) | 박학래,<홍대용의 실학적 인간관>(≪실학의 철학≫, 한국사상사연구회 편, 예문서원, 1996), 270쪽. 김형찬,<박지원 철학사상의 실학적 기반>(위의 책), 315쪽. |
401) | 金泰永, 앞의 글, 233쪽. |
402) | 金駿錫,<柳馨遠의 變法觀과 實理論>(≪東方學志≫75, 延世大 國學硏究院, 1991), 94쪽. |
403) | 송갑준,<이익의 경학관>(≪실학의 철학≫, 한국사상사연구회 편, 예문서원, 1993), 183쪽. |
404) | 박학래, 앞의 글, 271쪽. |
405) | 김형찬, 앞의 글, 313쪽. |
406) | 琴章泰,<茶山의 天槪念과 天人關係論>(≪哲學≫25, 韓國哲學會, 1986), 57∼59쪽. |
407) | 최근 실학의 범위를 脫性理學이라는 규정 대신에 先秦儒學의 王政論에서 구하는 견해가 있다(金泰永, 위의 글, 232쪽). 실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왕도정치론의 특성에 관해서는 이 글 2)-(1)의 ‘실학적 왕도정치론’에 서술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