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사회개혁론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경제사상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던 왕도정치의 이념과 조선사회가 직면해 있던 현실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하여 일련의 사회개혁론을 전개했다. 즉 왕도정치의 이념을 제시한≪孟子≫의<滕文公 上>편에서는 “百工의 일은 본래 농사를 지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여, 勞心者와 勞力者를 구별해서 사회적 분업개념의 원형을 제시했다. 그러나 봉건사회 해체기에 처해 있었던 조선 후기 당시의 사회구조에서는 사회적 분업이라는 측면보다는 신분제도가 적용되는 사회적 불평등이 엄존하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이와 같은 당시의 신분제도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고착적 신분제에 의해서 사회를 설명하기보다는 사회적 분업에 가까운 개념으로 조선사회를 재편하고자 했다.
우선 실학자들은 당시 신분제도의 모순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능력보다는 문벌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양반이 아닌 中庶나 노비들은 차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신분간의 차별에 대해 그들은 조선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특유하게 형성된 인습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당시의 성리학에서는 箕子가 창시한 정당한 법으로 간주하였던 노비제도에 대해 이익은 이를 뒷날에 형성된 그릇된 규정으로 단정했다. 그는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 병폐로서 科業·閥閱·技巧·僧尼·遊惰와 더불어 奴婢를 들었다. 특히 관직도 없는 양반층이 노비를 부려 놀고 먹는 구조적 악습을 지적하고 노비법이야말로 인습 중의 인습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노비의 世傳法과 매매를 반대하는 등 노비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노비소유의 상한을 정하고 從母法을 시행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도 노비제도 자체에 대한 폐지를 주장하는 데에 이르지는 못했고,481) 현실적인 관행의 불합리를 개선하는 수준에서 신분제도의 모순을 제거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익은 풍속의 타락으로 인한 향촌신분질서의 동요를 사림파의 인륜회복 노력을 원용하여 극복해 보려 하였다. 그는 悌라는 횡적인 사회윤리의 회복을 통해 풍속교화 및 국운회복까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주자학의 명분론적 관념을 여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수원은 신분제도 개혁을 위한 방안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학교제도와 과거 및 관리임용제도를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모든 이에게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후보자인 士를 선발하자는 것이다. 이는 문벌에 의해 유지되었던 사회질서를 거부하고, 능력을 중시하는 인식태도를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그는 사농공상이라는 四民體制의 개편에 기초한 전문화된 분업의 수행만이 부국안민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홍대용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양반들이 빈궁해도 다른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놀고 먹는 무리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신분이 아니라 재능과 학식의 여부로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4민의 자식들이 모두 균등하게 교육 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四民皆學論을 내놓았다. 귀천의 신분이 제도적으로 고착되어서는 안되며 교육을 바탕으로 한 능력에 따라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재주와 학식이 있는 자는 農賈의 자제로서 廊廟에 앉더라도 참람하다 여길 것이 아니며, 재주와 학식이 없는 자는 公卿의 자제로서 下人이 되더라도 한스러이 여길 것이 아니다(洪大容,≪湛軒書≫내집 보유, 林下經綸).
그러나 그는 四民平等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언급하지는 못했다.482)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경우에도 사회신분제의 개혁논의에는 미진한 점이 많다. 그는 모든 신민을 士·農·工·商·圃·牧·虞·嬪·走의 九職으로 나누어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직역에 대한 종래의 신분적 파악에서 사회 분업에 따른 직능적 파악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의 농·공·상에의 참여와 농·공의 과학기술적 기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農六科제도와 工匠의 技藝경영을 통해 우수한 농·공인을 행정직에 발탁하는 일종의 직업별 과거제를 주장했다.483) 하지만 이러한 9직은 공동체적 필요에 의해 국가에서 배정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며 四民九職을 수평적·직능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신분제의 철저한 혁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또한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관해서는 인정을 하였지만 신분간의 위계질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국가에서 의지하는 것은 사족인데 그들이 권리도 세력도 없어지면 위급 할 때 小民의 난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丁若鏞,≪牧民心書≫, 禮典 辨等條).
그는 양반사족의 지도나 통솔 없이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신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교육관에도 드러나 양반자제와 서민은 교육기관이나 교육내용을 엄격히 구분하여 양반은 지도자로서 修己治人의 전인교육을, 일반 백성은 孝悌의 윤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양반은 통치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배우고 평민은 피지배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배계급의 선천적 우월과 피지배계급의 선천적 열등을 합리화시키는 운명론을 부정하고 인명을 중시하는 민본주의사상에서 계층간 격차를 좁혀 보려 했다. 그러나 정치의 담당자는 양반임을 내세우는 고정된 신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완전한 신분제의 타파로 나아가지도 못했다.484)
결국 당시의 실학자들은 만민평등의 원리를 객관적으로 이론화하는 단계에 나아가지는 못했고 신분제도의 철폐를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유교적 계층관념이 그만큼 완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며, 실학자 자신이 모두 사족출신이어서 그같은 관념의 벽을 온전히 허물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에 그들은 신분제도의 불합리성에서 오는 현실모순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개혁을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었던 향리에 대해서도 실학자들은 그들의 직임을 너무 소홀히 하여, 어떠한 사회적 진출의 기회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정식 보수조차 책정하지 않은 것에 폐단의 원인을 두었다. 이는 실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로 유형원은 그들에게 전지 혹은 봉록을 책정해야 한다고 보았고, 정약용은 나아가 그들을 엄연한 하나의 관리직역으로 독자성을 갖도록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향리들에 대한 실질적인 대우를 통해 부정과 대민침학을 근절시키려 한 것이다.
또한 군현의 面任까지도 사실상 책임을 지고 업무를 수행할 현지의 職官으로 충보해야 한다고 보았다. 유형원은 面里의 鄕正에 사족을 동원하여 직무를 맡겨야 된다고 했고, 홍대용은 면임을 종9품의 정식 관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정전제의 시행과정에서 有産의 유지를 동원해 응분의 직임을 맡기도록 하고, 그 재능에 따라 정식관원으로 발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座首·別監 등 향임에 대해서도 정식관직을 부여하고 사족으로서 응분의 대우를 할 것이며 반드시 승진기회를 허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의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의 실학자들은 기술개발의 최종 통로를 관직의 수여에 귀착시키거나, 성공적인 독농가나 향촌지도자의 경우에도 그 최종 귀착점을 관직에 두고 있었다. 이는 당시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유식양반들에게 皆職을 보장하고, 그들을 지방행정의 하급담당자로 삼아 행정의 운용 효율을 높이고, 사회풍속의 개선도 기대할 수 있다는 인식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에서는 사회신분제도 자체를 인습적 관념에 매달리지 않았고 직능적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사회적 분업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사회구조를 논했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적 견지에서 제시되던 선천적 불평등성에 입각한 인간불평등성론에는 분명한 반대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만민평등의 원리를 개관적으로 이론화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고, 신분제를 철폐하여 사회적 평등을 이루어야 함을 선명히 주장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학자들은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서 자신들이 살고 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불평등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그들은 향촌제도의 개편과 연결하여 향직을 정식 관직화하기를 제안했고, 향리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같은 그들의 개혁안은 유식양반들에게 개직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