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환경인식
동서양 사람들의 환경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지리학의 학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서양의 지리학은 일찍이 환경문제를 놓고 결정론과 가능론이 첨예한 대립상을 보여온 데 반해 동양지리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해 왔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자연 그 자체이며, 자연은 만물을 키우는 활력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만물 중에 가장 귀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땅(자연을 의미함)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자신이 거주하는 땅의 활력의 후박 정도에 따라 다른 길흉화복을 받는다고 믿었다.552) 이와 같은 자연관에 따라 지리는 곧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지혜의 학문이라는 전통지리사상이 싹트게 되었다.
그런데 지상의 모든 생물은 땅으로부터 氣를 받아 생명을 유지하며 그 기는 인간의 그것과 통하기 때문에 인간이 만일 자연을 손상시키면 자신도 피해를 입는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이용하되 그 범위를 생존에 필요한 정도로 한정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들은 분석적·기계적인 방법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지식을 탐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기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왔다.553) 기는 풍수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탐구한 것으로서, 풍수가들은 지표상의 특정한 장소에만 생기가 집중되며 그러한 장소를 발견하고 그 유형을 밝히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풍수사상이 우리 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신라 말기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후 풍수는 地氣衰旺說과 陰陽補裨說의 두 분야로 체계화되었다. 전자는 지기 즉 토지자연에는 힘이 왕성한 때와 쇠할 때가 있는데 그것들이 성한 시기를 택하여 터를 잡은 왕조나 사람은 흥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망한다는 다소 환경결정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후자는 어떤 장소가 완벽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인간의 지혜로 그 미비점을 수정·보완하면 吉地가 될 수 있다는 낙관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풍수적 자연관은 선초에 漢陽定都의 이론적 배경이 된 國都風水로 각광을 받았으나 태종대 이후 유학자들로부터 배척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깊숙한 뿌리를 내려 사회에 적지 않은 해악을 끼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이것이 주술적 특성을 지녀 묘자리 선정의 기술로 전락하거나 鄭鑑錄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은거지 탐사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홍대용·박제가·정약용 등 실학자들은 풍수의 비과학성·비현실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554)
물론 陰宅風水의 주술적 및 이기적 허구성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나 풍수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던 시도는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하며, 이는 실학에서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익은 온 나라에서 五倫이 구비된 지역은 오직 영남뿐이며 그 이유는 영남의 대부분이 낙동강수계에 속하기 때문이며, 지형적 통일성 때문에 주민들 역시 잘 통합된다고 하였다.555) 이중환 역시 낙동강 유역에는 천여 리의 비옥한 들이 전개되기 때문에 경상도는 온 나라에서 지리가 가장 좋다고 하였으며,556) 특히 태백과 소백의 남쪽인 순흥·예안·안동 등지를 하늘이 내려준 福地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인식은 조선 후기의 취락입지론에서 하나의 패러다임 역할을 하였다.557) 취락입지로 가장 선호된 지형은 분지였으며, 그 중에도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두 개의 냇물이 마을 앞에서 합류하는 水口막이 안쪽이 최적의 장소로 인식되었다. 만일 수구막이가 허하면 인공조림을 하거나 못을 파서 그것을 裨補로 삼고 마을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였다.558)
조선 후기의 학자들은 자연보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익은 삼림남벌과 화전개간으로 인한 林相의 파괴는 임산자원의 고갈은 물론 토양유실, 홍수, 산사태 및 한발의 원인이라고 믿었다.559) 그러므로 그는 산허리 이상의 개간금지법을 철저히 시행함으로써 토양침식 방지와 삼림보호를 이룩할 것을 촉구하였다.
유형원은 당시의 인구규모로 평야지역의 농경지만 활용해도 식량조달이 가능하니 삼림파괴를 막을 것을 주장했으며,560) 이중환은 대관령 일대의 화전개발로 삼림이 황폐되며 토양유실로 인한 홍수가 잦다는 실례를 들었다. 그는 이 현상은 한강의 수심을 얕게 만들어 선박의 통행에 지장을 준다는 실증적 이론을 제시하였다.561)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의 지리학은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아 내용상으로나 방법론상으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관은 지리학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는 분야로서 외래사조의 영향에 따라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지리학에서 자연지리학은 방법론상 서양과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으나「환경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고유의 전통을 잘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崔永俊>
552) | 村山智順,≪朝鮮の風水≫(朝鮮總督府, 1931), 12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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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 | 崔永俊, 앞의 글, 171쪽. |
554) | 朴齊家,≪北學議≫, 外篇 葬論. 丁若鏞,≪經世遺表≫권 2, 秋官 刑曹 5, 刑官之屬 및 권 8, 地官修制 田制 11, 井田議 3. |
555) | 姜萬吉 외,≪韓國의 實學思想≫(三省出版社, 1983), 182쪽. |
556) | 李重煥,≪擇里志≫, 八道總論 慶尙道. |
557) | 李重煥,≪擇里志≫, 卜居總論 山水. |
558) | 村山智順, 앞의 책, 275∼276쪽. |
559) | 姜萬吉 외, 앞의 책, 162쪽. |
560) | 宋柱永,<磻溪 柳馨遠의 經濟思想>(≪서강대 논문집≫1, 1963), 4∼6쪽. |
561) | 李重煥,≪擇里志≫, 八道總論 江原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