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제도와 문화〉
이와 같이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말미암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 때, 조선이 당면한 여러 문제 중에서 가장 긴급한 것은 경제 제도의 개혁이었다. 그것은 계속된 전란에 의하여 토지 제도가 헝클어져서 나라의 재정이 곤란하여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은 전란이 끝나자 곧 경제 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우선, 조선은 전쟁 후 곧 토지를 다시 측량하고 세금 제도를 정비하였다.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대신 이를 쌀로 내게 하는 대동법과, 장정 한 사람에게서 두 필씩 받던 군포를 한 필로 줄이는 이른바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의 경제 제도를 개선하는 한편,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제 개혁도 그것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지는 못하였다.
문화면에서는 두 차례의 전란과 당파 싸움에 지친 민족의 기풍을 바로잡고자 하는 새로운 학문의 기풍이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싹트게 되었다.
이 무렵, 서양의 근대 문화가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즉, 중국을 통하여 새로운 과학 기구와 천주교에 관한 서적이 전하여 들어오고, 또 하멜과 같은 서양 사람이 표착하여 서양에 관한 지식을 소개하였다.
이와 같은 서양 문화의 전래와 두 차례의 전란은 조선의 학자들을 크게 자극하여, 새로운 학문의 기풍을 나타나게 하였다.
지금까지 조선의 학문을 지배한 것은 주자학이었으나, 주자학이 너무나 이론과 형식에만 치우친 까닭에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이것을 비판하고 현실 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이것이 실학 운동이다.
이 학풍은 영조, 정조 때에 가장 발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