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붕당 정치의 발달과 변질
붕당 정치의 발달
안으로는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고, 밖으로는 외침의 위협이 증대되는 상황 속에서, 정치를 주도한 것은 양반들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고, 군제를 개편하였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지위를 보다 강화하려 하였다.
조선 시대의 정치 권력은 기본적으로 국왕에게 있었다. 그런데 비변사 기능의 확대, 강화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지배 계급으로서의 양반층은 16세기 말 이래로 붕당을 형성하여 정치를 주도하면서, 17세기에는 병권까지 장악하여 권력의 기반을 굳혀 갔다.

여러 붕당이 생겨나면서 정쟁이 전개되었다. 양반은 한번 양반이 되었다고 하여 대대로 그 특권과 지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유교적 교양을 쌓아야 했고,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해야 하였으며, 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런데 양반의 수는 날로 증가하는 반면에, 관직의 수는 계속 제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양반들 사이에 관직 쟁탈전이 심해졌고, 그것은 붕당을 둘러싼 정쟁으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초기의 붕당 정치는 동인과 서인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는데,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왜란을 겪고 난 뒤, 광해군 때에는 북인이 집권하였다. 그러나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으로 북인 정권은 몰락하고, 이후의 정국은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서인 정권은 전제와 독주를 스스로 경계하고, 남인의 진출을 허용하여 비판 세력을 공존하게 하는 붕당 정치를 실현시켜 갔다. 서인 정권의 이러한 정책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어, 이후 한동안은 서인과 남인1)의 공존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서인 정권은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에 주력하여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의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였는데, 이것들은 후에 그들의 권력 기반이 되었다.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도 남인은 꾸준히 진출하였다. 남인들은 서인 정권이 추구한 북벌 운동의 무모함을 비판하면서, 예송 논쟁(禮訟論爭)2)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예론을 중심으로 한 붕당 간의 대립은, 예의(禮儀) 문제가 당시에는 사회 질서의 기본적인 규범이었으므로 붕당 정치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붕당 정치의 변질
예송 논쟁에서, 처음에는 서인, 뒤에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이 우세해졌다. 집권한 남인은 상대 당인 서인에 대한 처벌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그런데 온건파가 우세하였기 때문에 서인에 대한 극단적인 탄압은 행해지지 않았고, 따라서 서인의 일부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즉, 상대 세력의 공존을 인정하는 붕당 정치의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졌다.
그러나 이른바 경신환국에 의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수립되자(1680), 붕당 사이의 대립 양상은 크게 달라져 갔다. 즉, 집권한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의 재기를 막았다. 이로부터 붕당 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대 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하였고, 외척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져 갔으며,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에 두어지는 등 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속에서, 정권은 몇몇 벌열(閥閱)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고, 지배층 사이에서는 종래 공론에 의한 붕당보다도 개인이나 가문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또, 양반층이 분화되면서 권력을 장악한 부류가 있는가 하면, 다수의 양반은 몰락하여 갔다.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양반층은 자기 도태를 거듭하였다. 중앙의 정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정계에서 배제되어 지방 세력화하였으니, 그들은 연고지로 낙향하여 그 곳에 서원을 건립, 세력의 근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서원은, 여론을 조성하여 붕당 정치의 중요한 본거지로서의 역할을 하던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특정 가문의 선조를 받드는 사우(祠宇)와 뒤섞여 도처에 세워졌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갑술환국 이후 남인의 본거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 1) | 서인과 남인은 학문의 뿌리도 다르지만, 정치 사상에 있어서도 다른 점이 있었다. 서인은 상업과 기술 발전에 호의적이며, 노비속량과 서얼허통에도 비교적 적극적이었고, 부국 강병에 관심이 깊었다. 이에 반하여, 남인들은 수취 체제의 완화와 자영 농민의 육성에 치중하고, 상업과 기술 발전에 소극적이었다. 권력 구조에 있어서도, 서인은 대신이 주도하는 정치를 지향한 데 대하여, 남인은 왕권의 강화와 정책 비판 기능에 큰 비중을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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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예송 논쟁은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논쟁 속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즉, 1659년의 기해예송에서는 효종의 상을 당하여 자의 대비의 복제가 문제 되었는데, 서인은 1년설을,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여 1년설이 채택되었다. 그 후, 1674년 갑인예송에서는 효종비의 상을 계기로 또 자의 대비의 복제가 문제 되었는데, 서인은 9개월설을, 남인은 1년설을 주장하여 1년설이 채택되었다. 이 같은 논쟁은, 효종이 왕통을 이었으나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유교적 가치관의 문제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