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삼국의 다툼

고구려의 강성
고구려는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중국 세력에 대비코자,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은 서울을 환도성(丸都城)으로 옮기었고, 다음의 동천왕 때는 위장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떨어져서 나라 형편이 위태할 지경까지 되었으나, 억센 기풍을 가진 고구려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15대 미천왕(美川王)은 낙랑군을 쳐 없애고 현도군에 들어가, 요하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의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에 전연(前燕)이 다시 침입하여, 환도성을 떨어뜨리고 노략질을 하고 가니, 북으로 뻗으려던 고구려의 힘은 하는 수 없이 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남쪽의 백제는 바로 마한을 넘어뜨리고, 대방군을 합한 영명한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였으므로, 백제에 침입한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도리어 싸움에 지고, 그 위에 추격하여 온 백제군에 의하여 평양성 하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백제에 의하여 받은 바 타격은 컸으나, 점차 그 힘을 회복하여,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백제를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고, 또한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어 만주의 넓은 땅을 모두 차지하고, 일생 동안에 64성, 1,400여 촌을 합하는 대 업적을 이루었으니, 현재 통구(通溝)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왕비는 그의 거룩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 또한 부왕의 뜻을 이어 남쪽으로 뻗기 위하여 우선 서울을 압록강 유역에서 평양으로 옮기고(서기 427년), 다시 백제를 쳐서 개로왕(蓋鹵王)을 잡아 해치니, 고구려의 영토는 북은 요하에서부터, 남으로는 죽령(竹嶺)에 이르는 전성 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신라의 발전
고구려의 남쪽에 대한 압박은 백제로 하여금 서울을 한강 유역에서 웅진(熊津-공주) 지방으로 옮기게 하였으나, 또한 신라에 대하여도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양국은 저절로 손을 맞잡고 고구려에 대항하게 되었다. 백제 제26대 성왕(聖王)은 고구려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하여, 우선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부여)로 서울을 옮겨, 불교, 학예 및 산업을 장려하여 나라 힘을 기른 후, 신라와 더불어 북쪽으로 쳐 올라갔다. 이리하여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의 옛 땅을 도로 찾는 데 성공하였으며, 신라 또한 이 기회에 한강 상류 지방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신라는 발전 일로를 걷고 있던 진흥왕(眞興王) 때였으므로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제까지 손잡았던 백제가 도로 찾은 한강 하류 지방을 빼앗으니, 이 후 신라와 백제는 서로 싸우는 사이가 되었다.
신라가 이와 같이 흥하게 된 것은 제22대 지증왕(智證王) 때부터로서, 왕은 나라 이름을 중국 문자에 따라 신라(新羅)라 정하고, 임금의 칭호도 왕이라 일컬었다. 다음의 법흥왕(法興王)은 법률을 정하고,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또 나라 안에서 불교를 믿게끔 허가하였다. 그러나 신라로 하여금, 대외적으로 크게 발전시키어 삼국 통일의 기초를 세운 것은 진흥왕(眞興王)이었다. 즉 왕은 매우 영명한 임금으로서, 안으로는 불교, 기타 문화 사업에 힘을 썼으며, 밖으로는 한강 유역을 합하고, 또한 가라 제국을 쳐 없애고, 신라의 영토를 넓히는 데 성공하였으니, 지금 각지에 남아 있는 4개의 순수비(巡狩碑)는 진흥왕의 위대한 사업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후 백제 및 고구려의 쉴 새 없는 공격은 신라의 큰 시련(試鍊)이 되었는데, 이를 끝내 견디어 낸 신라에 비로소 삼국 통일이라는 영관(榮冠)이 돌아온 것이다.

〈알아두기〉
미천왕. 광개토왕비. 장수왕. 웅진성. 진흥왕. 순수비. 환도성. 지증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