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임사홍(任士洪)이란 음험하고 간사한 자가 있었다. 선조
(先朝)에게 내쫓겨 거의 30년이나 지났으므로 항상 이를 갈다가, 그 아들 임숭재(任崇載)가 옹주에게 장가를 들면서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다. 연산군
(燕山君)의 뜻을 잘 헤아려 마침내 조정을 위협할 술책을 비밀리에 마련하였다. 연산군
이 크게 기뻐하여 급히 종1품의 벼슬에 발탁하고서, 아무 때나 부르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상의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임사홍은 연산군
의 부름을 받으면 반드시 수수한 차림을 하고 어둠을 타 뒷문으로 들어갔다. 연산군
은 항상 내 벗 ‘활치옹(豁齒翁)’이 왔다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임사홍의 이가 부러져 그 사이가 넓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산군
은 이즈음 형벌을 마음대로 내리고 언관
(言官)들을 추궁하였다. 대신부터 대간
(臺諫)과 시종까지 거의 다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어 조정이 텅 비었다. (어머니를) 폐비(廢妃)한 일을 원망하며 선왕인 성종
(成宗)의 후궁들을 매질하여 죽이고 그 자녀는 유배 보내거나 죽였으며, 그 며느리는 남의 첩으로 보내거나 여러 군[諸君]과 부마(駙馬)에게 주었다.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를 욕되게 하여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이 나서 죽게 하고,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는 제도[以日易月制]1)
를 이용하여 그 상(喪)을 치르는 기간도 줄였다. (또한) 소혜왕후가 아직 빈소에 있는데도 풍악을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를) 폐비하는 의논에 참여한 자와 (어머니에게) 존호(尊號)를 올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자를 모두 무거운 형벌로 다스렸다. (이미) 죽은 자는 그 시체를 베고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그 친족도 연좌로 처벌하였다. 살아 있는 자는 매를 때리며 심문한 뒤 멀리 유배를 보냈다. 교리(校理) 권달수(權達手)는 (연산군
에게 어머니에게 존호를 올리면 안 된다고) 가장 앞서서 주장하였으므로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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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례를 빨리 끝내고자 달수를 날수로 계산하여 상례를 치르던 제도를 말한다. 삼년상의 경우 상례 기간이 25개월인데, 이를 25일로 환산하여 상복을 입는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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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권63, 12년 9월 2일 기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