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국교를 맺고 서로 예방하며 풍습이 다른 나라를 어루만지고 접촉할 때는 반드시 그 정세를 알아야 그 예를 다할 수 있고 그 예를 다해야 그 마음을 다할 수 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신(臣) 신숙주
(申叔舟)에게 명하여 해동 여러 나라에 대한 조빙(朝聘)으로 왕래한 연고와, 관곡(館穀)을 주어 예접(禮接)한 규례를 찬술하라 하셨습니다. 신은 명을 받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옛 문헌을 상고하고 보고 들은 것을 참고하여 그 지세를 그렸고, 대략 세계(世係)의 본말과 풍토의 숭상하는 바를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응접하던 절차까지 덧붙여서 편집하여 책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신 신숙주
는 오랫동안 전례관(典禮官)을 맡았습니다. 또 일찍이 바다 건너 직접 그 땅을 답사하여 섬이 별처럼 흩어져 있는 것과 풍속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 이 책을 만들어 끝내 그 요체를 얻지 못했지만, 이로써 그 대강만이라도 알게 되면 거의 그 정세를 이해하고 그 예를 짐작할 수 있어서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신숙주'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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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보건대 동해의 가운데 자리 잡은 나라가 하나만이 아니나, 그 가운데 일본이 가장 오래되었고 또 큽니다. 그 땅이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 제주 남쪽에까지 이르고, 유구(琉球)와 서로 맞대어 땅의 모양이 매우 깁니다. 처음에는 곳곳마다 집단으로 모여 각자 나라를 세웠는데, 주(周) 평왕(平王) 48년에 (일본의) 시조 적야(狄野)가 군사를 일으켜 모조리 쓸어 버리고 비로소 주(州)·군(郡)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맡겨 각각 나눠서 다스리게 하니 중국의 봉건 제도와 비슷하였으나 중앙의 통제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습성이 강하고 사나워 칼 쓰기에 뛰어나고 배 타기에 익숙합니다. 우리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처지이기에 잘 어루만져 주면 예로써 조빙하고 잘못하면 번번이 강탈을 자행하였습니다. 전조(前朝)의 말엽에 국정이 문란하여 어루만짐을 잘못하니 드디어 변방에서 난리를 일으켜 연해 수천 리의 땅이 폐허가 되었는데, 우리 태조
께서 분연히 일어서서 지리산·동정(東亭)·인월(引月)·토동(兎洞)에서 수십 차례를 싸우고서야 왜적
이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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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국한 이래로 여러 성군이 서로 계승하여 정사가 밝아져 나라 안을 잘 다스려 융성하게 되자 외적이 곧 순종하여 변방 백성이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세조
께서 중흥하시어 여러 대 동안 태평이 있으니, 안일함이 독약보다 폐해가 더 심하다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이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며, 인재를 발탁하여 여러 정사를 함께 행하고 폐해진 것을 진흥시키고, 기강을 바로 세우며, 밤중에도 옷을 벗지 아니하고 새벽밥을 먹어 가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일을 생각해서 어진 다스림이 이미 흡족하고, 교화가 멀리 퍼지니, 만 리 밖에서도 험준한 산은 사닥다리를, 바다는 배를 이용하여 멀다고 오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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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일찍이 들으니 이적(夷狄)을 대우하는 방도는 외부를 단속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내부를 닦는 데 있으며, 변방의 방어에 있지 아니하고 조정에 있으며, 무력에 있지 아니하고 기강에 있다 하였습니다.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익(益)이 순(舜) 임금에게 경계하기를, “걱정이 없는 것을 경계하시어 법도를 잃지 마시고 안일함에 빠지지 마시고 풍악에 음탕하지 마시며, 어진 이에게 맡겼으면 의심하지 마시고, 간사한 자를 제거하는 데 의심하지 마시며, 백성의 찬양을 구하기 위해서 도리를 어기지 마시고 내 욕심을 따르기 위해서 백성을 거스르지 마소서. 게으름이 없고 허황됨이 없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와서 조회를 드리오리라” 하였습니다. 순 임금 같은 성인을 임금으로 삼고도 익의 경계가 이와 같은 것은 대개 국가가 걱정이 없는 때를 당하면 법도가 해이하기 쉽고, 안락이 방종으로 흐르기 쉬워서 그렇습니다. 수신하는 방도가 혹시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조정에서 행하고 천하에 펴지며 사방의 오랑캐에게 미루어 나가는 데 어디인들 그 이치를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자신을 닦고서 남을 다스릴 수 있고 안을 닦고서 바깥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반드시 마음에 게으름도 없고 일에 황당됨도 없는 연후에야 융성한 다스림의 교화가 멀리 사이(四夷)에 미치게 됩니다. 익의 깊은 뜻이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생각하며 군사를 궁지에 몰아넣고 무기를 한없이 사용하여 바깥 오랑캐를 억제하려 하면 천하가 퇴폐하여 마침내 한 무제(漢武帝)와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 혹시 자기의 부강만을 믿고 사치를 극도로 하여 오랑캐에게 뽐내려 하면 제 몸도 또한 유지하지 못하여 마침내 수양제(隋煬帝)의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기강이 서지 아니하여 장수는 교만하고 군사는 나약한데 강한 오랑캐와 함부로 부딪치면 제 몸이 죽게 되어 마침내 석진(石晉)1)
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는 모두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따르며 안을 비우고 바깥에 치중했기 때문입니다. 안이 다스려지지 못했는데 어떻게 바깥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걱정 없는 때를 경계하여 게으름이 없고 허황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있지 아니한데, 비록 정례를 참작해서 오랑캐의 마음을 거둬들이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옥문(玉門)을 닫고 서역의 볼모를 사절한 것도 역시 안을 먼저하고 바깥을 뒤로 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명성이 중국에서 넘쳐흘러 먼 오랑캐의 지방에까지 미쳐서 일월이 비치고 서리·이슬이 내리는 곳이라면 누구나 존숭하고 친애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야말로 하늘을 짝하는 지극한 공이요, 제왕의 거룩한 일입니다.
1)
석진(石晉) : 중국 오대십국 시기 오대의 왕조 중 하나인 후진(後晉, 936~946)을 말하는데, 석경당(石敬塘)이 세웠다고 하여 석진이라고도 한다. 석경당은 후당(後唐)의 개국공신으로서 후당 2대 황제인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사위가 되었으며,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북경 유수(北京留守)를 지냈다. 명종 사후 이종후(李從厚)가 즉위하였는데, 명종의 양자인 노왕(潞王) 이종가(李從珂)가 반란을 일으켜 이종후를 몰아내자 이종후를 돕지 않고 이종가에게 동조하여 자리를 보전하였다. 이종가는 즉위한 후 석경당을 경계하여 936년 석경당을 천평군 절도사(天平軍節度使)로 좌천시켰으므로, 이에 불만을 품은 석경당은 이종가를 몰아내기 위하여 요나라에게 군사 지원을 청하였다. 그는 요 태조 야율덕광에게 부자 관계가 되기를 청하고, 요나라 군대를 빌리는 대신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요에 할양하고 매년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석경당은 후당을 멸망시킨 후 요 태조에게 책봉을 받아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재위 6년만에 사망하였다. 그가 만리장성에 걸쳐 있던 연운 16주를 바친 일은 장성 이남의 평야지대에 대한 방어물을 잃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는 중원(中原)의 한족(漢族) 국가가 북방 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는 원인으로 간주된다. 이후로 이 지역은 요나라, 금나라 등이 순서대로 지배하였으며, 오대의 후주, 통일 왕조 송 등이 여러 번 이 지역을 탈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쪽에서 오면 어루만져서 선물을 넉넉히 주며 대우를 후히 하는데도 그들이 보통으로 여기고, 진위를 마구 속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머물면서 시일만을 지체하고 변명을 갖가지로 부리고 있으니, 그놈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면 곧바로 화를 냅니다. 그래도 땅이 멀고 바다가 가로막혀서 그 실상을 파악하고 그 정세를 살필 수가 없으니, 대우는 선왕의 옛 규례에 의거하여 진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정세가 각기 경중이 있어서 또한 후하고 박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따위 자잘한 절목쯤은 담당관들이 할 일입니다. 성상께서는 옛사람의 경계한 내용을 생각하시고 역대의 잘못된 것을 거울삼아 먼저 자신을 닦으십시오. 이로써 (그 영향이) 조정에 이르고, 사방에 이르고, 바깥 지역까지 이르게 하시면, (성상께서) 하늘을 짝할 만한 극치의 공을 이룩하시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하물며 자잘한 절목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동문선』권95 「서」 해동제국기서
- 석진(石晉) : 중국 오대십국 시기 오대의 왕조 중 하나인 후진(後晉, 936~946)을 말하는데, 석경당(石敬塘)이 세웠다고 하여 석진이라고도 한다. 석경당은 후당(後唐)의 개국공신으로서 후당 2대 황제인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사위가 되었으며,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북경 유수(北京留守)를 지냈다. 명종 사후 이종후(李從厚)가 즉위하였는데, 명종의 양자인 노왕(潞王) 이종가(李從珂)가 반란을 일으켜 이종후를 몰아내자 이종후를 돕지 않고 이종가에게 동조하여 자리를 보전하였다. 이종가는 즉위한 후 석경당을 경계하여 936년 석경당을 천평군 절도사(天平軍節度使)로 좌천시켰으므로, 이에 불만을 품은 석경당은 이종가를 몰아내기 위하여 요나라에게 군사 지원을 청하였다. 그는 요 태조 야율덕광에게 부자 관계가 되기를 청하고, 요나라 군대를 빌리는 대신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요에 할양하고 매년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석경당은 후당을 멸망시킨 후 요 태조에게 책봉을 받아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재위 6년만에 사망하였다. 그가 만리장성에 걸쳐 있던 연운 16주를 바친 일은 장성 이남의 평야지대에 대한 방어물을 잃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는 중원(中原)의 한족(漢族) 국가가 북방 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는 원인으로 간주된다. 이후로 이 지역은 요나라, 금나라 등이 순서대로 지배하였으며, 오대의 후주, 통일 왕조 송 등이 여러 번 이 지역을 탈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