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朴强)은 영해부(寧海府) 사람으로 대대로 영해부의 향리
(鄕吏)를 역임해 왔다. 영해는 덕원도호부(德原都護府)였었는데 동여진
(東女眞)이 들어와 침략할 때 성이 함락되었기에 읍격(邑格)을 지관(知官)으로 낮추고, 관할하던 보성(甫城)은 복주(福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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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단천의 옛 이름
에 귀속시키자, 온 읍(邑)이 수치로 여겼지만 보성을 찾아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박강의 증조인 박성절(朴成節)이 마침 상계리(上計吏)
군에서 장부를 관리하는 관직
가 되어 서울에 가게되어, 마침내 도당(都堂)
도평의사사
에 진정하였는데, 임금에게 보고되어 예주목(禮州牧)으로 승격시키고, 다시 보성을 복귀시키고 주목(州牧)의 인(印)을 주조하여 내려보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이 곧 그 도장이다. 주(州)의 인사로서 조정에 올라가서 벼슬하는 사람이나 고향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박성절에게 공적을 돌려 그의 향리
역을 면제해 주려 하자, 박성절은 “나는 지금 늙었으니 비록 나의 복무를 면제한다 할지라도 다시 양반
노릇은 못할 것이니, 나의 자손을 면제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그러시오. ” 라고 하고,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이에 그의 아들인 박학여(朴學如)와 손자인 박천부(朴天富)는 모두 고을에서 향리
역을 담당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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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부는 곧 박강의 아버지다. 현릉(玄陵, 공민왕
)이 임금이 되기 전에 연경(燕京)에 있었는데, 박천부가 그 수하로서 따라다녔다. 박천부는 힘이 세어 한쪽 팔로 공민왕
을 번쩍 들고 한 바퀴 돌며 고함을 치곤 했으므로, 현릉이 즐거워하며 그를 좋아하였다. 충목왕이 죽고 황제가 공민왕
을 임금으로 세우기를 명하여 임금의 행차가 떠나려 하는데, 본국(고려) 출신 환자(宦者)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용봉(龍鳳)
을 따르던 자들이 모두 새 임금에게로 달라붙고 오직 박천부만이 들어와서 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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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환관 고용보(高龍普, ?~1362)
이 황제에게 말하여 참람되게 충정왕(忠定)으로 갈아 세우니, 그때에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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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은 비장히 이르기를, “오직 너만이 아직 내 곁에 있구나. 나라고 어찌 본국으로 돌아갈 날이 없겠느냐. 너도 꼭 머물러 있다가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만일 돌아가게 될 때에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 상도(上都)
이 미처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연경에서 바다를 건너오다가 배가 침몰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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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동경과 서경을 일컫던 말
에 있으려 하는데 네가 나를 따라가겠느냐” 하니, 박천부가 꿇어앉아 말하기를, “신은 오직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받들고 가는데 때로는 등에 업고 가기까지 하였다. 훗날 박천부는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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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 1361)에 홍건적이 경성을 함락하고 공민왕
이 안동(安東)에 행차하여 군대를 보내어 수복할 때에 박강이 처음으로 군에 응모하여 총병관(摠兵官)인 정세운(鄭世雲)을 따랐다. 전투가 시작되려 할 때에 적이 성중에서 목채[寨]를 쌓아 올리어 항전하므로 여러 군대가 전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박강이 곧 말에서 내려 어떤 집에 들어가서 판자로 만든 대문짝을 얻어 가지고 메고 나와서 사다리를 만들어서 올라가며 칼을 뽑아 크게 고함을 치니, 목채 위에 올라 있던 적들이 모두 무서워 땅에 떨어져서 저희끼리 서로 짓밟혔다. 박강이 따라 내려가서 수십 명을 마구 베니 여러 군대가 계속 전진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서 적의 괴수인 사류(沙劉)를 베었다. 이로 말미암아 싸움을 크게 이기자 총병관이 이를 장렬히 여겨 계급을 특진시켜 상을 주고 중랑(中郞)으로 추천하기 위하여 명부에 올려 두었었는데, 바로 세 원수(元帥)1)
가 총병관을 죽였다. 이로 인하여 진급시키려던 대로 되지 못하고 마침내 산원(散員)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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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말기 중국에서 침략해 온 홍건적을 몰아낸 안우(安禑)·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 등 세 사람이다. 그들은 총대장인 정세운(鄭世雲)을 죽여 그 죄로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에 원수인 박춘(朴椿)을 따라 이성(泥城)
14, 1365)에, 임금은 박강이 용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또한 그의 아버지가 자기를 업으며 이끌고 다니던 공로를 생각하여 그를 불러 보고 시위한 군사로서 힘이 센 자와 씨름을 부쳐 보았더니 군사들이 모조리 넘어졌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국고의 쌀을 내리고 바로 중랑장에 임명하여 임금을 시위하는 부대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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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강계군
에 가서 두 번이나 강을 건너서 정탐하였는데 그 공로로 별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반란을 일으킨 신하 최유(崔濡)가 왕실의 서자(庶子)로서 일찍이 중이 됐던 자를 세워서 임금으로 삼아 변경을 침입하여 수주(隨州)
평안북도 정주 지역의 옛 지명
를 함락하였다. 여러 장군이 항전하여 물리쳤는데 박강이 선봉이 되어 그들을 추격하여 압록강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또 낭장에 승진되었다. 을사년(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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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년(공민왕
16, 1367)에 왜적
이 서강(西江)을 침범하여 나진(羅進) 등을 보내어 바다에 나아가 추격하여 잡기를 명하고, 박강도 함께 가게 하면서 철갑(鐵甲)과 활과 칼을 주었는데, 왜를 만나 여러 번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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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신해년(공민왕
20, 1371) 겨울에, 원수인 이희필(李希泌)을 도와 울라산(鬱羅山)에 가서 공격할 때에도 임금은 또 말을 하사해 보냈다. 성을 공략하는데 가장 먼저 올라 괴수를 잡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또 사재소감(司宰少監)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옮겨서 예의총랑(禮儀摠郞)에 이르렀다. 그 뒤에 시골에 은퇴하여 있다가 병인년(우왕
12, 1386)에 나라에서 원수 육려(陸麗)를 보내어 영해(寧海)에 주둔할 때에 박강은 또다시 따라가서 경주 송라촌(松蘿村)에서 왜적
과 싸웠는데 칼을 휘둘러 5~6명의 목을 베니 육공(陸公)이 조정에 보고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로 가자(加資)하고 서운관(書雲觀) 정(正)에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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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년(우왕
14, 1388) 10월 축산도 병선 도관령(丑山島兵船都管領)이 되었는데 왜적
의 배가 갑자기 들이닥쳐 우리의 배를 포위하고 영해성(寧海城)을 침범하려 하는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인심이 흉흉하였다. 박강이 한 번 활을 쏘아 적의 괴수를 맞히고 잇달아 4~5명을 쏘아 맞히니, 적은 그만 포위를 풀고 달아나서 다시 오지 않아 온 고을이 지금까지 편히 잠잘 수 있는 것도 박강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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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공양왕 1, 1389) 겨울에, 내가 영해에 귀양 가서 비로소 박강을 알았다. 날마다 나를 찾아왔는데 예가 공손하고 말이 적었으며, 글을 약간 알아 나의 강설(講說)을 재미있게 들으며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그가 근신하며 순후한 사람으로 여겨 중시하였지만 그에게 그런 특이한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 과거에 판사를 지낸 백공(白公) 진(瑨)이 또한 이 고을에 살았는데, 젊어서 백당(柏堂)
사헌부의 별칭
에 벼슬하여 일찍 총병관의 참좌(參佐)가 되어 문서를 맡아 보면서 강을 데리고 함께 다니며 직접 판자 대문짝을 메고 목채를 점령하던 분이었다. 상세히 나에게 이야기하여 주었기 때문에 박강이 힘이 세고 용맹하며 또한 공로가 있으면서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인 줄을 알았으니 더욱 더 중히 여기게 되었다. 이때 박강의 나이가 벌써 59세였는데도 힘이 조금도 줄지 아니하였다. 몸이 크고 기걸하며 수염이 길었다. 천성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데, 시골 사람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그 외모를 보아서는 두어 말이라도 마실 수 있을 듯한데 그 입으로는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대개 건장하고 힘이 센 사람은 술주정이 많은 법인데, 강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또 가상한 일이다. 아, 신축년 난리에 능히 먼저 올라가서 도성을 회복하였고, 계묘년 전쟁에는 선봉이 되어 반역을 무찔렀으니 그 공적이 얼마나 컸는가.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충의를 가진 용사가 위급함을 당하여 목숨을 바치고, 팔을 걷어붙이고 먼저 소리치며 칼날을 무릅쓰고 강한 적을 꺾어서 용맹을 얻어 적을 막아 내어 훌륭한 공적을 세웠으나, 위에서 추천하여 발탁해 주는 사람이 없고 아래로는 그것을 기록하여 주는 친구가 없으니 운수가 나빠서 공신에 오르지도 못하고, 사적이 없어져서 전하지도 못하여, 마침내 시골에서 죽어 버리어 초목과 함께 썩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은 가엾은 일이다. 그러므로 박강에 대하여 전기를 쓴다.
『양촌집』권21 「전류」 사재소감박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