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조에서 강원도 감사
가 올린 보고문에 따라 명령을 내리기를, “도(道)에서 바치는 염초(焰硝)는 영동 연해(沿海)의 각 고을에서 구워 만드는 것이므로, 이로 인하여 사람마다 그 기술을 전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백성이나 주인을 배반한 종들이 무릉도(茂陵島)나 대마도
등지로 도망하여 가서 화약을 만드는 비밀스런 기술을 왜인에게 가르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오니, 이제부터는 연해의 각 수령들에게 화약을 구워 만들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강원도 감사' 관련자료
'대마도' 관련자료
『세종실록』권34, 8년 12월 13일 임신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유한(柳漢)이 보고하기를,
“신은 죄수의 자손으로서 특별히 재조(再造)의 은혜를 입어, 조정의 반열에 끼여 여러 번 현질(顯秩)에 옮겼으니, 자신을 반성하오면 알맞지 아니하므로, 아침으로 생각하고 저녁으로 헤아려서 항상 총애하여 맡겨 주신 중책에 부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억견(臆見)을 가지고 삼가 적어서 올리나이다.
1. 화포(火砲)는 외부의 적을 막는 급한 일이므로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본 군기감을 설치하여 오로지 그 일을 맡게 하여, 장인들을 모집하여 실습(傳習)시켜 모두 정통하게 알게 하였으니, 그 화약 만들기의 정교함과 불꽃 만들기의 묘함이 비록 중국이라 하더라도 나을 수는 없습니다. 귀한 물건은 중하게 여겨야 하고, 큰 일은 비밀로 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전에는 화약을 만드는 장인(工匠)이 그 기술에 정통한 자가 많지 않았는데, 법이 오래 되어 폐단이 생기어 화약장인(藥匠)의 숫자가 전보다 많아져서 현재에 그 업에 종사하는 자가 24인이고, 기간이 만료되어 관직에 있는 자가 20인이고, 권지 직장(權知直長)에 근무하는 자가 20여 인이나 되어 모두 그 기술에 정통하였는데, 여항(閭巷)에 섞여 살아서 중외(中外)와 서로 통하여 귀에 익어졌습니다. 하물며 외국 사람들 중 우리나라로 귀화하여 와서 살거나, 서로 교류하려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바다 연변에 가득 차 있사오니,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상인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누설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방금에는 풍속이 다른 오랑캐들이 의(義)를 사모하여 봉화(烽火)의 경고(警告)를 보지 못하오나, 그러나, 다스림과 어지러움은 무상한 것이니 혹시라도 불행히 흉하고 추악한 무리가 다시 함부로 날뛰어 변방을 침략하는 일이 있어서, 산직에 소속된 화약 장인들 역시 포로가 되어 생사(生死)에 핍박되어 그 법을 누설하여, 전하여 배우게 되면 저 사람들의 기술로 좋은 화약을 써서 반드시 며칠이 안 되어 완성될 것이오니, 후일의 근심이 되는 것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번의 안수만(安壽萬)·이기(李奇)의 일이 족히 밝은 증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깊이 그 폐단을 알아서 친히 만드는 법을 세우고 출입을 엄하게 금하였으니, 기미를 막는 방도(方道)가 지극하였으나, 현재 본 군기감에 근무하고 있는 자는 물론이고 만기가 되어 관직을 떠난 자도 관에서 관리하지 않고 사방에 왕래하니 실로 적당치 못합니다. 이제부터는 현재 근무하고 있는 화약장인은 나누어 양번(兩番)으로 만들어서, 우량한 사람 한둘을 뽑아서 그 업무를 오로지 도맡게 하여, 화약을 배합하는 기술과 중량을 다는 임무를 모두 손수 하게 하고, 사비(仕備)로 직책을 준 자도 산직에 소속되기를 기다려서 그대로 급료를 주고 넉넉히 봉족(奉足)을 주어 권하고 달래어서 본 군기감(本監)에 도로 근무하게 하고, 나이 70이 된 뒤에야 영구히 그 의무에서 면제하게 하고, 또 능력있는 자를 뽑아서 본래의 인원을 보충하고, 그 나머지 화약장인은 다만 화포의 제작에만 참여하게 하여, 함부로 전수하여 배우는 일이 없게 하면, 10년이 지나지 못하여 늙은 자는 남아 있지 않고, 새 사람은 아는 이가 적어서, 그 법이 저절로 진귀하여지고, 그 전하는 것이 저절로 비밀스럽게 되어, 국가가 오로지 그 이익을 누리게 되고, 서로 통하여 누설할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1. 궁시(弓矢)와 갑주(甲胄)는 적을 방비하는 것이니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군기감은 직책이 군기(軍器)를 맡아서 그 과정(課程)을 엄하게 하여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하여 창고에 저장한 것이 용납할 수 없게까지 되었으니, 군용(軍用)에 있어서는 이미 부족한 근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계의 제작은 다만 견고하고 탄탄한 것만을 요구하고 한갓 많은 것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 일이 없어 병혁(兵革)을 드물게 쓰기 때문에, 본 군기감에 저장한 것을 쌓아 두고 쓰지 않아서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더위와 장마에 녹이 슬고, 벌레와 좀에 상하여 부러지고 터지고 깨져서, 명목은 있으나 실상이 없으니, 경비는 많이 드나 이익이 없고, 공장의 일은 수고로우나 효험은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간은 묵은 것을 수선하고, 1년간은 새 기계를 창조하여, 이것이 끝나면 다시 되풀이하여 엄밀하게 검사하면, 몇 해가 안 되어 기계가 정밀해질 수 있고, 차차 축적하기를 오래 하면 점점 더 많아질 수 있습니다.
1. 염초(焰焇) 굽는 법을 비밀히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사로이 굽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명령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전에 지방에서 염초를 구울 때에는 중앙 관리들을 파견해 보내어 도회소(都會所)로 모이게 하였고, 제조를 감독하는 자도 두어 사람에 불과하였고, 담을 파고 물을 들어오게 하여 바깥 사람이 출입하지 못하게 하여, 그 법이 어떠한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조심하고 비밀히 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세 도(道)의 군현(郡縣)에 상공(常貢)으로 정하여 각각 굽는 장소를 두고, 매양 굽는 때를 당하면 아전들을 시켜 감독하고, 촌민(村民)들이 일에 나와서 상·하번(上下番)으로 교대하여, 손으로 그 작업을 하고 눈으로 그 일을 보아서, 한 고을 사람들 중 그 기술을 아는 자가 반이 넘습니다. 법을 엄격하게 세우더라도 오래되면 반드시 폐단이 있는 것인데, 처음에 엄밀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상공(常貢)의 법을 없애고 여러 도로 하여금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의 예(例)와 마찬가지로, 화약장인을 나누어 보내어 굽는 것을 친히 감독하고, 바깥 사람이 익히지 못하게 하여 군대의 재물을 귀중하게 대하면, 오랜 시간동안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보고를 병조로 내렸다.
『세종실록』권68, 17년 5월 21 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