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죽(汗竹)1)
이 완성되면 전왕(前王)의 치란(治亂)을 살펴 볼 수 있으니, 〈동국사략의〉 초고(草藁)를 인쇄하여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하는 저의 어리석은 의견을 피력하여 성상의 귀를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국(東國)은 아득한 상고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단군은 당요(唐堯) 시대에 국조(國祚)를 열었고, 기자(箕子)는 주 무왕(周武王)에게 분봉(分封) 받았습니다. 그 후로 사군(四郡)으로 나뉘어지고, 얼마되지 않아 삼한(三韓)이 정치(鼎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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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죽간(竹簡)에다 글을 썼기 때문에 한죽(汗竹)이라 하며, 한청(汗靑)이라고도 한다.
솥발처럼 대치함
하여 강역 내에서 시끄러운 전쟁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군신(君臣)들이 행사(行事)한 시말(始末)은 성한 적도 있고 쇠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책은 부족하고 연대는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대사와 관련된 내용들은 패관(稗官)
민간에 나도는 풍설(風說)과 소문을 수집하던 일을 맡은 말단 관원
의 기록에 의거하고, 근래 것은 김부식(金富軾)이 편집한 『삼국사기』 만을 볼 뿐인데, 내용이 성글거나 번잡스러워 읽게 되면 잠이 오고, 황당하고 괴이하여 이야기를 하려 해도 조리가 서지 아니하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덕은 날마다 새롭고 성상께서는 하늘의 뜻을 따르시는 분이시니, 정무를 보는 틈틈이 문예(文藝)에 마음을 두시어, 삼국(三國)의 서적이 그릇되어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시니, 이에 큰 선비들에게 명령을 내려 함께 의논하여 수정하게 하시매, 시비에 공정함은 춘추(春秋)의 필법을 근본으로 하고, 연대에 따라 기사를 붙이는 것은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규모를 모방하며, 문체는 요약하되 큰 뜻은 밝게 하고, 문장은 근엄하고 의논은 정당하니, 진실로 삼장(三長)
재주[才]·학문[學]·식견(識見)을 말하는 것으로 역사가가 갖추어야 할 요소
의 솜씨라 할 만하옵니다. 다만 〈동국사략이〉 한밤중에 성상께서 열람하시는 데에는 대비할 수 있지만, 오직 권질이 너무 많아서 진실로 선사(繕寫)하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삼가 여론에 따르시어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어 인쇄하여, 한 세상에 행하게 하면, 반드시 집마다 전하고 사람마다 외워서 천추의 사적이 눈앞에 있으리니, 강학의 수용에 도움이 되고 문치를 숭상하는 교화에 조금이나마 이익이 될 것이옵니다. 『동문선』권41 「표전」 의청간행동국사략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