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살펴보건대, 하늘의 이치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性)과 기(氣)를 합하여 한 몸에 주재하는 것을 심(心)이라 이르고, 심이 사물에 감응해서 바깥에 발현된 것을 정(情)이라고 이르는데, 성은 곧 심의 본체이고 정은 심의 작용이며, 심은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을 총괄한 명칭이다. 그러므로 심은 성과 정을 통괄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性)의 조목은 다섯이 있으니,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요, 정(情)에는 조목은 일곱이 있으니,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입니다. 정(情)이 발하는 데에는 도의(道義)를 위하여 발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자 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과,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것과, 의(義)가 아닌 것을 보면 부끄러워하고 미워함과, 종묘
를 지나갈 때 공경하는 것과 같은 부류와 같을 것이니, 이를 곧 도심(道心)이라 이릅니다. 또 구체(口體)를 위해서 발현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배고프면 먹으려고 하고, 추우면 입으려고 하고, 피로하면 쉬려고 하며, 정기(精氣)가 왕성하면 남녀 관계를 생각함과 같은 부류들이 이것이니, 이를 곧 인심(人心)이라고 이릅니다.
'종묘' 관련자료
이(理)와 기(氣)는 서로 섞이고 융합되어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니, 심(心)이 움직여서 정(情)이 될 때 발현시키는 것은 기(氣)이고 발현되는 까닭은 이(理)입니다. 기(氣)가 아니면 발현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발현될 바가 없으니, 어찌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다만 도심은 기에서 떠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발할 때는 도의(道義)를 위한 것이므로 성명(性命)에 소속시키고, 인심도 또한 이(理)에서 근본하는 것이나 그것이 발할 때는 구체(口體)를 위한 것이므로 형기(形氣)에 소속시켰을 뿐입니다. 마음의 가운데는 처음부터 이심(二心)이 없고 다만 발하는 곳에 도의를 위하고 주체를 위하는 두 가지 단서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도심을 발하는 것도 기(氣)이지만 성명(性命)이 아니면 도심이 발생하지 아니하고, 인심을 근원하는 것도 이(理)이지마는 형기가 아니면 인심은 발생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혹원(或原)·혹생(或生), 공(公)·사(私)로 차이가 있는 까닭입니다.
도심은 순연(純然)한 천리(天理)이므로 선(善)만 있고 악(惡)은 없으며 인심(人心)은 천리도 있고 인욕(人欲)도 있으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습니다. 이를 테면 마땅히 밥을 먹어야 할 때 먹는 것이다, 마땅히 옷을 입어야 할 때 입는 것은 성현도 이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천리이고, 식색(食色)의 생각으로 인하여 흘러서 악이 되는 것은 인욕입니다. 도심은 다만 지키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인심은 인욕으로 흘러 들어가기 쉬우므로 비록 선하여도 위태로우니, 마음 공부하는 자가 한 생각이 발하는 때에 도심인 줄 알면 곧 확충시키고, 인심인 줄 알면 곧 정밀하게 살펴서 반드시 도심으로써 절제하여, 인심은 항상 도심에 청명(聽命)하도록 하면 인심도 도심이 될 것이니, 어떤 이(理)가 보존되지 않겠으며 어떤 욕(欲)을 막지 못하겠습니까.
진덕수(眞德秀)가 천리와 인욕을 논한 것이 지극히 분명하여 학자가 공부하는 데 매우 유익하나 다만 인심을 오로지 인욕에만 돌려서 한결같이 극복해 다스리게만 한 것은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주자(朱子)가 이미 말하기를, “비록 상지(上智)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니, 성인도 또한 인심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 전부를 인욕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를 통해 본다면 칠정은 곧 인심·도심·선악의 총명(總名)입니다. 맹자는 칠정 중에 나아가 선한 일면만 뽑아내어 사단(四端)으로 지목하였으니, 사단이란 곧 도심과 인심의 선한 부분입니다. 사단에 신(信)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이미 성심(誠心)이 있어 사단이 된 것이니 신은 그 가운데 있다.” 하였습니다. 대개 오성(五性 : 인·의·예·지·신)의 신(信)은 오행(五行 : 수·화·목·금·토)의 토(土)와 같아서 정해진 위치도 없고 전담하는 기(氣)도 없이 사시(四時)에 기왕(寄旺)하는 것입니다.
논하는 사람들이 혹은 사단을 가지고 도심을 삼기도 하고 칠정으로 인심을 삼기도 하니, 사단은 진실로 도심이라고 이를 수 있겠지만 칠정을 어찌 인심이라고만 이를 수 있겠습니까. 칠정 이외에는 다른 정이 없는데 만일 치우치게 칠정을 인심만으로 돌린다면 이는 절반(인심)만 들고 절반(도심)은 버린 것입니다. 자사자(子思子)가 “칠정의 미발한 것은 중이라 이르고 이발(已發)한 것은 화(和)라”하여 성정(性情)의 온전한 덕을 논하면서 단지 칠정만 거론했을 뿐이니 어찌 치우치게 인심(人心)만 거론했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칠정이 인심과 도심, 선과 악의 총칭인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것 없는 것입니다. 성(性)이 심(心)에 구비되어 발하여 정(情)이 되는 것입니다. 성은 본시 선한 것이므로 정도 또한 선하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인데, 정에 선하지 않음이 있기도 하는 것은 어찌된 까닭입니까.
이(理)는 본래 순선(純善)하나 기에는 청탁(淸濁)이 있는데 기는 이를 담은 그릇입니다. 아직 발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기가 활동하지 않으므로 중체(中體)가 순수하게 선하지만 그것이 발할 때 미쳐서는 선과 악이 비로소 나누어집니다.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발한 것이나 그 근본은 다만 천리일 뿐입니다.
정의 선한 것은 청명(淸明)한 기를 타고 천리(天理)를 따라 곧장 나와서 중(中)을 잃지 않으니 그것이 인·의·예·지의 단서가 됨을 볼 수 있으므로 사단으로 일컬었고, 정의 선하지 못한 것은 비록 이(理)에 근원한 것이지만 이미 오탁(汚濁)한 기에 가리워지는 바가 되어 그 본체를 잃고 옆으로 나와서 혹은 지나치기도 혹은 미치지 못하기도 하여, 인(仁)에 근본 하면서도 도리어 인을 해치고, 의(義)에 근본 하면서 도리어 의를 해치며, 예(禮)에 근본 하면서 도리어 예를 해치고, 지(智)에 근본 하면서 도리어 지(智)를 해치므로 사단이라고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주자(周子)는, “오성(五性)이 감동하여 선악이 나누어진다” 하였고, 정자(程子)는, “선악이 모두 천리이다”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천리로 인하여 인욕이 있다” 하였으니 모두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선악이 기의 청탁에 연유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그 이론을 탐구해도 해득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발(理發)을 가지고 선으로 삼고 기발(氣發)을 가지고 악을 삼아 이와 기가 서로 분리되게 만들었으니, 이는 밝지 못한 이론입니다. 신은 어리석고 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다음과 같이 도(圖)를 만들었습니다.
『율곡전서』권14, 설, 인심도심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