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본성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요, 허공에서 생겨나 자연의 이치에 따라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움직이게 하고 혈맥을 흘러 통하게 하여 정신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느낀 바가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소리도 다르게 표현됩니다. 마음이 기쁘면 그 소리가 명랑하고, 마음에 성이 나면 그 소리가 거칠고 날카로우며, 마음이 슬프면 그 소리가 빠르고 가라앉으며, 마음이 즐거우면 그 소리가 너그러우며 느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같지 않은 소리를 조화롭게 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임금께서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인도함에는 바르고 바르지 않음이 있으니 풍속의 성쇠 또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음악의 도(道)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크게 관계가 되는 까닭입니다.
오제(五帝)의 음악을 논해보면 당우(唐虞)
때보다 잘 갖추어진 적이 없었지만, 예악의 제정을 주공(周公)에게 일임하였으니, 당시의 음악의 제도를 시행하였던 방식이 『서경(書經)』의 전모(典謨)와 『주례(周禮)』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이는 모두 예악(禮樂)을 먼저하고 형벌을 뒤로 하여 교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방(四方)이 교화를 입어, 40년 동안 형벌을 쓰지 않아도 되는 융성함이 있었습니다.
고대의 두 성왕(聖王)인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다스린 나라
때보다 더 성대한 적이 없었는데, 이는 오로지 후기(后夔)의 협찬(協贊)에 맡겼고, 삼왕(三王)의 음악을 논해보면 성주(成周) 1)
1)
성주(成周) : 주(周)나라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주나라가 통일되고 가장 융성한 시기로 간주된다. 주 왕조는 건국 초(武王) 무왕 때 서쪽의 호경(鎬京)을 수도로 하여 주나라의 종묘를 두고 종주(宗周)라 하였는데, 곧 주나라의 서도(西都)이며 현재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지역이다. 성왕과 그를 보필하던 주공은 주 왕실 내부의 반란 및 멸망한 은나라 왕족인 무경의 반란을 토벌한 후 동쪽으로 낙읍(洛邑)을 건설하여 동도(東都)로 삼았다. 이는 성주(成周)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근처였다. 주공과 성왕 두 지도자에 의하여 제후국 분봉이 대부분 완료되고 주나라는 정치적 안정기에 들어갔으며, 이러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왕의 아들 강왕(康王)은 주의 황금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따라서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두 개의 도성을 세운 시기를 서주 시대(BC 1122~BC 770)라고 하며, 견융(犬戎)의 침략을 받아 유왕(幽王)이 죽고 평왕(平王)이 낙읍(洛邑)으로 패퇴한 후의 시기를 동주 시대(BC 770~BC 256)라 한다.
세교(世敎)가 쇠퇴하면서 순박한 풍속에서 멀어지고 오로지 형벌로만 통치를 돕게 하여, 법 맡은 관리를 귀하게 여기고 예의(禮義)를 갖춘 선비를 천하게 여기게 되었으니, 이른바 선왕(先王)의 음악은 남김없이 사라지고 숭상하는 것이라고는 모두 음란하고 경박한 세속의 음악이었습니다. 이른 풍조의 음악이 전해져 정(鄭)·위(衛)나라의 상간(桑間)·복수(濮水)의 음악이 되었고, 사방으로 퍼져나가 진(陳)·초(楚)나라의 무당의 풍속이 되었다가, 끝내는 어지러운 풍속이 이어져서 서로 망해 버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장홍(萇弘)과 사광(師曠)의 귀 밝음과 계찰(季札)과 중니(仲尼) 같은 성인(聖人)으로서도 구제할 수 없었습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숙손통(叔孫通)이 불타고 남은 것을 수습하여 겨우 의례를 만들었으나, 음악에 있어서는 진나라의 옛 음악을 그대로 답습하여 단지 종묘
악장(宗廟樂章)만을 만들었을 뿐, 음악의 본원(本源)을 총괄(總括)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러므로 한 문제(漢文帝)는 국초(國初)라서 겨를이 없었다는 말이 있었고, 한 무제(漢武帝)는 뜻은 있었으나 보좌할 적격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연년(李延年)이 「방중가(房中歌)」를 지었지만 끝내는 사사로운 연회악(宴會樂)이 되었으며, 경방(京房)은 60률(律)을 창설(創設)하였으나 견강부회(牽强附會)2)
의 고루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종묘' 관련자료
2)
견강부회(牽强附會) :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리에 맞추려 함.
진(晋)의 순욱(荀勗)·장화(張華), 진(陳)의 정역(鄭譯), 수(隋)의 우홍(牛弘), 당(唐)의 조효손(祖孝孫), 송(宋)의 화현(和峴)·진양(陳暘)으로 말하면 그 시대마다 담당자가 있어서 음악을 만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단(末端)만 헤아릴 뿐 근본을 몰랐으니 어찌 이들과 더불어 악도(樂道)의 묘(妙)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의 저술이 깊이 율려(律呂)의 본원(本源)을 얻었으나, 탄법(彈法)과 지법(指法)으로 연주하여 성(聲)과 율(律)에 맞게 못하였으니, 이는 마치 호미와 쟁기를 안고 가면서도 김매고 밭가는 기술을 알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 보면 음악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음악은 저절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하여 무너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제(黃帝)의 함지(咸池), 제곡(帝嚳)의 육영(六英), 순(舜)의 소(韶), 탕(湯)의 호(濩)의 음악이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은 당시의 세상이 태평했던 까닭이지 음악의 공(功)이 아니며,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 모든 사람에게 비난받는 것은 당시 임금이 방탕했던 까닭이지 음악의 죄가 아닙니다.
우리 대동(大東)은 삼한(三韓)이 정립한 이래로, 나라마다 음악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기가 미비하고 성음의 결함이 많으며, 동이와 말갈의 저속한 음악도 섞여 있으니, 누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고려 중엽에 이르러 송나라 황제가 태상악(太常樂)을 하사하였고, 우리 조선에 이르러는 명나라 황제가 어부(御府)에 소장된 악기를 하사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경(磬)·관(管)·생(笙)·우(竽)·금(琴)·슬(瑟)의 악기가 갖추어지게 된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세종대왕
(世宗大王)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군(聖君)으로, 음률(音律)에 정통(精通)하시어 종전의 누습(陋習)을 씻어 버리고자 하였는데, 마침 거서(巨黍)가 해주(海州)에서, 채석(彩石)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동방(東方)에 화기(和氣)를 펴서 유능하신 임금을 내려주시어 새로 음악을 제작토록 하신 것입니다. 이에 거서로 십이율을 정하고 채석으로 경쇠를 만들었습니다. 또 음악의 강(腔)을 만들고 그 강을 바탕으로 악보를 만들어 박자의 완급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당시 음악을 맡은 사람은 박연
(朴堧)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연
이 습득(習得)한 것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찌 대왕(大王)의 계획에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박연은 찬조하는 데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세조대왕
은 더욱 음악에 정통하시어 많은 가곡(歌曲)을 지으셨고, 또 제사(祭祀)의 음악을 찬정(撰定)하시어 종묘(宗廟)
에 천신하기도 하셨는데, 그것을 지으신 법(法)은 선왕의 뜻을 좇아 만든 것입니다. 다만 그때 찬조(贊助)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세종대왕' 관련자료
'박연' 관련자료
'박연' 관련자료
'세조대왕' 관련자료
'종묘(宗廟)' 관련자료
지금 우리 전하(성종
)께서는 성군으로 성군을 이으셔서, 성헌(成憲)을 준수하여 전대 왕들이 계발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셨으니, 예악(禮樂)으로 태평 시절을 일으키실 때가 바로 지금이 적절한 시기입니다. 그런데 장악원(掌樂院) 소장의 의궤(儀軌)와 악보(樂譜)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많이 훼손되었고, 다행이 남아있는 것도 역시 모두 소략하고 오류가 있으며 빠진 것이 많았습니다. 이에 무령군(武靈君) 유자광
(柳子光) 및 신 성현
(成俔)에게 명하여 주부(主簿) 신말평(申末平), 전악(典樂) 박곤(朴棍)·김복근(金福根)등과 더불어 다시 교정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먼저 율관(律管)을 만드는 원리(原理)를 말하고 다음에는 그 율(律) 쓰는 법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악기·의물(儀物)의 형체(形體)·제작(制作)하는 일과, 무도(舞蹈)·철조(綴兆)하는 진퇴(進退)의 절도 등에 이르기까지 갖추어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책이 만들어지자 책명을 『악학궤범(樂學軌範)』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성종' 관련자료
'유자광' 관련자료
'성현' 관련자료
신은 삼가 생각건대 5음(音) 12율(律)은 음악의 근본입니다. 만물이 생겨나면 감정(感情)이 있게 되고 감정이 발하면 음이 되는데, 음에는 다섯 가지가 있어서 오행(五行)에 분배하며, 율관의 길고 짧음에 따라 청성과 탁성이 있으며, 율에는 12가지가 있어서 12월(十二月)에 분배합니다. 5음과 12율이 서로 맞아 12율을 삼분손일(三分損一)
3분의 2
하여 하생(下生)하고, 삼분익일(三分益一)
3분의 4
하여 상생(上生)하여 그 쓰임이 무궁한데, 여덟 가지의 악기에 붙이는 것도 모두 그러합니다. 노래는 말을 길게 하여 율에 맞추는 것이고, 춤은 팔풍(八風)을 행하여 그 절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늘에서 그 법칙을 취한 것이지 인간의 사사로운 지혜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천지의 중화(中和)를 얻으면 그 음악이 바르게 되어 제자리를 얻지만, 만일 중화를 잃으면 인심이 음일(淫溢)해져서 간사한 데로 흐르게 됩니다. 이에 변치(變徵)·변궁(變宮)의 2음(音)이 그 진정(眞正)을 깍고, 청성(淸聲) 넷이 그 본정(本正)을 빼앗게 되므로 군신과 사물의 분별이 어지러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소리에 변성과 청성이 있는 것은 마치 음식에 짜고 심심한 것이 있어서 오로지 대갱(大羹)·현주(玄酒) 같은 담담한 맛만 쓸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정성(正聲)이 항상 주(主)가 되어 변성(變聲)을 제어(制御)하여 중화(中和)의 기운을 어긋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음악은 세 가지가 있으니 아악
(雅樂)·당악(唐樂)·향악(鄕樂)으로, 아악은 제사에 쓰고, 당악은 조회(朝會)와 연향(宴饗)에 쓰고, 향악은 민간에서 일상적 말로 음악을 익히는 데 쓰는데, 그 대요(大要)는 7균(均) 12율(律)을 쓰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무릇 사람의 재능(才能)은 균일하지 않기 때문에, 음악을 알기 어려운 사람과 알기 쉬운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수법(手法)에 묘(妙)한 사람이 장단을 모르기도 하고, 장단에 능(能)한 사람이 음악의 근본 원리에 결함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분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전체를 환하게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참으로 음악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아악' 관련자료
좋은 음악도 귀를 스쳐 가면 곧 사라지고, 사라지면 흔적이 없어집니다. 이는 마치 그림자가 형체(形體)가 있으면 모이고, 형체가 없어지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악보가 있으면 그 음율의 느리고 빠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림이 있으면 악기의 형상을 분변(分辨)할 수 있을 것이고, 책이 있으면 악기를 다루고 연주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등이 졸렬한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찬(撰)한 이유입니다.
홍치(弘治) 6년(1493, 성종
24) 8월 상한(上澣)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 겸 동지춘추관
사 세자우빈객(禮曹判書兼同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 신(臣) 성현
(成俔)은 삼가 서문을 씁니다.
'성종' 관련자료
'춘추관' 관련자료
'성현' 관련자료
『악학궤범』 서
- 성주(成周) : 주(周)나라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주나라가 통일되고 가장 융성한 시기로 간주된다. 주 왕조는 건국 초(武王) 무왕 때 서쪽의 호경(鎬京)을 수도로 하여 주나라의 종묘를 두고 종주(宗周)라 하였는데, 곧 주나라의 서도(西都)이며 현재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지역이다. 성왕과 그를 보필하던 주공은 주 왕실 내부의 반란 및 멸망한 은나라 왕족인 무경의 반란을 토벌한 후 동쪽으로 낙읍(洛邑)을 건설하여 동도(東都)로 삼았다. 이는 성주(成周)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근처였다. 주공과 성왕 두 지도자에 의하여 제후국 분봉이 대부분 완료되고 주나라는 정치적 안정기에 들어갔으며, 이러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왕의 아들 강왕(康王)은 주의 황금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따라서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두 개의 도성을 세운 시기를 서주 시대(BC 1122~BC 770)라고 하며, 견융(犬戎)의 침략을 받아 유왕(幽王)이 죽고 평왕(平王)이 낙읍(洛邑)으로 패퇴한 후의 시기를 동주 시대(BC 770~BC 256)라 한다.
- 견강부회(牽强附會) :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리에 맞추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