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通信使)임광(任絖), 부사(副使) 김세렴(金世濂), 종사관(從事官) 황호(黃㦿)가 일본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그들을 불러다 보고 일본의 사정을 하문하였다. 임광이 대답하기를, “그 나라는 명령이 엄하여 이웃 나라 사신에게 그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본 바로는 관백(關白)1)
은 군병의 일을 힘쓰지 아니하여 포(砲)를 쏘는 일은 완전히 폐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포성을 들으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일본 전선(戰船)에도 방패막이가 있던가?”라고 하니 임광이 아뢰기를, “사면에 있었고 그 사이에 장막을 설치하여 무기를 갖추어 두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접대하는 예는 어떠하던가?”라고 하니 임광이 아뢰기를, “그릇은 정결하고 진기한 음식이 가득하였으니 사치스러움은 지극하였으며 예절도 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 사치가 중국과 비교하여 어떻던가?”라고 하니 임광이 아뢰기를, “가택의 도배는 모두 니금(泥金)을 사용하였으며, 장관(將官)의 마구간이 혹 수백 칸이 되는데, 모두 오색으로 단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보다 심하다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치가 그러한데 그곳의 백성은 곤궁하지 않던가?”라고 하니 임광이 아뢰기를, “사치가 이미 극에 달하고 부세도 역시 무거우니 농민의 곤궁하고 고달픔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관백의 사람됨은 어떠하였으며, 그들의 정치는 또한 어떻던가?”라고 하자 임광이 아뢰기를, “그의 속마음은 알 수 없으나 외모로 볼 때 용렬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흉년을 만났을 때는 너그러운 정치를 행하기에 힘썼고 또한 재화를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평수길(平秀吉)2)
보다 훌륭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가광(家光)
'통신사' 관련자료
1)
일본에서 덴노(天皇)를 보좌하며 정무를 집행하는 관직으로, 간파쿠라는 명칭은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인 887년 고코 덴노(光孝天皇)가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에게 내린 조서(詔書)에서 처음 등장하며 967년 레이제이 덴노(冷泉天皇) 재위기 이래로는 사실상 상설화되었다. 본래 고셋케(五攝家)라고 하는 후지와라 씨의 직계에 해당하는 고노에(近衛)·다카쓰카사(鷹司)·구조(九條)·니조(二條)·이치조(一條)의 다섯 가문이 독점해왔으나, 1585년 고셋케 간의 간파쿠 지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간파쿠가 되었으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개창한 에도(江戶) 막부(幕府) 시기에는 1615년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가 설정되어 막부의 추천을 받아야 간파쿠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파쿠를 칭한 이래로 일본의 최고 권력자를 ‘관백’, 즉 간파쿠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 사료에서 거론되고 있는 관백은 일본 교토(京都) 조정의 간파쿠가 아니라 당시 에도 막부의 쇼군(將軍)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를 지칭하는 것이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지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합소생기(太閤素生記)』의 기록에 따르면 오와리국(尾張國) 아이치군(愛知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키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독립 당시의 이름은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수하가 된 뒤 1573년에 아자이(淺井) 세력을 상대로 전공을 세워 하시바(羽柴)라는 묘지(苗氏)를 하사받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개명했고, 이후 1582년에는 일본의 4대 명문 우지[氏] 중 하나인 타이라(平) 씨를 사용하여 타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가 되었다. 1585년에는 마찬가지로 일본의 4대 명문 우지 중 하나인 후지와라(藤原) 씨의 직계에 해당하는 고노에 가문의 고노에 사키히사(近衞前久)에게 양자로 입적된 뒤 간파쿠(關白)에 취임하면서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가 되었고, 이듬해인 1586년에는 오기마치 덴노(正親町天皇)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우지를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우지를 하사받은 일본 장수들을 지칭할 때 의도적으로 도요토미라는 호칭을 배제하고 그 대신 타이라를 활용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 일본의 새로운 질서를 부정하는 동시에 미나모토(源) 씨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기존 질서를 뒤엎은 ‘역적’의 이미지를 부여하여 이해하였다.
에도 막부의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 대대로 세습할 것이라고 하던가?”라고 하니 임광이 아뢰기를, “가광(家光)은 아들이 없어서 조카뻘에 해당하는 일족에게 물려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인조실록』권34, 15년 3월 9일 무신
- 일본에서 덴노(天皇)를 보좌하며 정무를 집행하는 관직으로, 간파쿠라는 명칭은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인 887년 고코 덴노(光孝天皇)가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에게 내린 조서(詔書)에서 처음 등장하며 967년 레이제이 덴노(冷泉天皇) 재위기 이래로는 사실상 상설화되었다. 본래 고셋케(五攝家)라고 하는 후지와라 씨의 직계에 해당하는 고노에(近衛)·다카쓰카사(鷹司)·구조(九條)·니조(二條)·이치조(一條)의 다섯 가문이 독점해왔으나, 1585년 고셋케 간의 간파쿠 지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간파쿠가 되었으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개창한 에도(江戶) 막부(幕府) 시기에는 1615년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가 설정되어 막부의 추천을 받아야 간파쿠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파쿠를 칭한 이래로 일본의 최고 권력자를 ‘관백’, 즉 간파쿠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 사료에서 거론되고 있는 관백은 일본 교토(京都) 조정의 간파쿠가 아니라 당시 에도 막부의 쇼군(將軍)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를 지칭하는 것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지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합소생기(太閤素生記)』의 기록에 따르면 오와리국(尾張國) 아이치군(愛知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키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독립 당시의 이름은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수하가 된 뒤 1573년에 아자이(淺井) 세력을 상대로 전공을 세워 하시바(羽柴)라는 묘지(苗氏)를 하사받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개명했고, 이후 1582년에는 일본의 4대 명문 우지[氏] 중 하나인 타이라(平) 씨를 사용하여 타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가 되었다. 1585년에는 마찬가지로 일본의 4대 명문 우지 중 하나인 후지와라(藤原) 씨의 직계에 해당하는 고노에 가문의 고노에 사키히사(近衞前久)에게 양자로 입적된 뒤 간파쿠(關白)에 취임하면서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가 되었고, 이듬해인 1586년에는 오기마치 덴노(正親町天皇)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우지를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우지를 하사받은 일본 장수들을 지칭할 때 의도적으로 도요토미라는 호칭을 배제하고 그 대신 타이라를 활용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 일본의 새로운 질서를 부정하는 동시에 미나모토(源) 씨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기존 질서를 뒤엎은 ‘역적’의 이미지를 부여하여 이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