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
(金富軾)은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 사람이다.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임.】
위로 삼국(三國)의 시초와는 1200여 년의 기간인데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에 혁거세(赫居世)가 개국(開國)하였다.】
조정(趙鼎)·장준(張浚)1)
과 같은 사람이 위로 위상(魏相)·병길(丙吉)2)
의 일을 기록할 때 어떻게 자세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우리나라의 고사(古史)는 황당하고 저속하여 하나도 그것을 근거로 할 수 없다. 삼한(三韓)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기타 사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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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정(趙鼎)·장준(張浚) : 모두 남송 고종 때 사람으로, 금(金)나라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으며, 진회(秦檜)가 주장하던 금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다가 모두 유배되었음. 『송사(宋史)』권360~361
2)
위상(魏相)·병길(丙吉) : 모두 한나라 선제 때의 재상으로 두 사람이 합심하여 정사(政事)를 도와 치적을 많이 남겼음. 『전한서(前漢書)』권74
우리나라의 일을 말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중국의 역사를 널리 참고하여, 우리나라에 관계된 모든 것은 빠짐없이 찾아내어 여기저기 것을 종합하고 분류하여, 연도를 고찰해서 차례로 편입시켜야만 비로소 종핵(宗核)
사건의 본말을 종합하여 밝힘
의 실효를 거둘 것이다. 다만 동사(東史)만을 근거로 하여 구차하게 책을 만들려고 한다면 사실을 빠뜨리거나 연대를 그르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뜻을 둔 자로서는 마땅히 먼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강역고(疆域考)』는 잘 완비된 책은 아니다. 귀양살이 중에 서적이 전혀 없어서 찾아서 기입할 수 있는 자료는 십칠사(十七史) 중에서 동이열전(東夷列傳) 4~5권뿐이고, 그 제왕기(帝王紀)·표(表)·지(志)와 기타 열전(列傳)은 일체 보지를 못하였으니, 어찌 빠지는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 전부를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기(史記)』·『한서(漢書)』뿐이며, 『동이열전』을 참고할 수 있는 것은 또한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晉書)』·『위서(魏書)』·『북사(北史)』·『수서(隋書)』·『신당서(新唐書)』뿐이니, 빠뜨리고 그릇되는 것은 면할 수 없는 형편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성경지(盛京志)』는 비록 전부를 보았으나 이 두 책에 기록된 우리나라 강역(彊域)에 대한 설명은 복잡하게 뒤엉켰으므로 간추려서 바로잡을 수도 없을 정도인데, 더구나 이를 믿고 근거로 삼을 수야 있겠는가.
『성경속지(盛京續志)』는 일찍이 지리책(地理策)
지리에 대한 과거 문제
을 주대(奏對)
임금의 물음에 신하가 대답하여 아룀
할 적에 잠깐 한 번 보았을 뿐 지금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한 번 조사하여 빠뜨린 것을 보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열수(洌水)
한강
이북에서 압록강 이남은 한(漢) 무제(武帝) 이후로 늘 한나라 땅이었는데, 광무제(光武帝) 때부터 살수(薩水)
청천강
이북은 고구려에 소속시키고
【지금의 안주(安州). 청천강 이북임.】
이남은 한나라에 소속시켰는데, 그 후에 패수(浿水)
대동강
이북까지 모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대동강 이북임.】
그러나 패수 이남과 한수 이북은 끝내 한나라 관리 관할 하에 들어갔고 위(魏)·진(晉)을 지나 북위(北魏) 때까지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동사(東史)를 엮는 자는 패수 이남과 열수 이북의 지역에 대해서는 별도로 한리표(漢吏表)를 만들고, 아울러 그 사실을 기록하여 그 자취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동사에는 모두 이러한 사실이 빠졌으니, 이것은 불완전한 사례 가운데 큰 것이다. 열수는 지금 서울에 있는 강이다. 이 열수 이북은 본래 한나라 땅에 속하였고 이남은 삼한(三韓)으로서, 이 강물은 곧 삼한과 한나라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므로 삼한 사람들은 이 열수를 가리켜 ‘한강(漢江)’이라고 한다.
백두산의 원줄기는 몽고 땅에서부터 남으로 1000여 리를 달려와 백두산이 되었고, 그 큰 줄기의 동쪽 지역에 별도로 한 국면을 이루어 다른 지역과 섞이지 않은 곳이 있는데, 우(虞)·하(夏)·은(殷)·주(周) 때는 이를 ‘숙신(肅愼)’이라 하였고, 한나라 때는 ‘읍루(邑婁)’, 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
【물길(勿吉)이라고도 하는데, 『위서(魏書)』에 보임.】
송나라 때는 ‘여진
(女眞)’, 지금에 와서는 ‘오랄영고탑(烏喇寧古塔)’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부식
(金富軾)의 『삼국사기
(三國史記)』에는 이미 한 선제 때부터 엄연히 말갈이란 이름이 나오니, 이는 매우 황당한 것이다. 비유하면 북적(北狄)인 경우 삼대(三代)
사기(史記)의 크게 잘못된 점으로서 덮어 둘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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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하(夏)·은(殷)·주(周)를 말함
때는 ‘훈육(葷粥)’, 한나라 때는 ‘흉노(匈奴)’, 당나라 때는 ‘돌궐(突厥)’, 송나라 때는 ‘몽고’라고 하여 종류는 같지만 명칭은 동일하기가 어려운데, 한나라 역사를 엮으면서 돌궐이 침입하였다고 쓴다면 껄껄 웃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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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馬韓)은 열수 이남의 땅으로 지금의 경기·호서·호남 지역이고,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좌도 지역이고, 변한(弁韓)은 지금의 경상우도 지역인데, 최치원(崔致遠) 이하 삼한의 강계를 논한 것은 한결같이 잘못된 점이 많다.
『여유당전서』제1집 제14권 문집, 서, 제강역고권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