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품사(計稟使)인 전 밀직사(密直使) 조임(趙琳)이 중국 남경(南京)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서교(西郊)로 나가서 맞이하였다. 조임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들어 전달하였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예부(禮部)에서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에게 자문(咨文)을 보낸다. 홍무(洪武) 25년(1392년, 태조 1년) 10월 11일에 본부(本部)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의 관원이 서각문(西角門)에서 이른 아침에 온 서사(書辭)를 가져와서 주문(奏聞)하고 삼가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았다. 칙지에 ‘고려에서는 그전에 사람을 보내어 와서 본국(本國)의 실정과 사유를 아뢰었는데, 지금 온 서사(書辭)를 보니 전일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중국은 강상(綱常)이 있어 역대의 천자가 서로 전하여 지키고 변경하지 않는다. 고려는 산이 경계를 이루고 바다가 가로막아 하늘이 동이(東夷)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는 아니다. 너희 예부(禮部)에서는 회답하는 문서에 「성교(聲敎)는 자유로이 할 것이며(聲敎自由), 과연 하늘의 뜻이 따르고 사람의 마음에 합하여 동이(東夷)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사절(使節)이 왕래할 것이니 실로 그 나라의 복일 것이다.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에서 어떤 칭호로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라고 하라’라고 하셨다. 이를 공경히 받들어 본부에서는 지금 황제 칙지(勅旨)의 사의(事意)를 갖추어 먼저 보낸다.”
조임이 또 선유(宣諭)를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이번에 내가 예부로 하여금 문서를 주어 보내니 그대는 다른 말을 덧붙여 상세히 회보(回報)하라. 예전 한(漢)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 때 뽑혀 간 관원은 도착하여 그대 나라를 수어(守禦)하였다. (그런데) 뽑혀 간 사람이 술을 좋아하고 여색(女色)을 얽매여 백성을 해쳤으므로, 그대 나라 사람들이 문득 살해하였으니, 그 일에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짐(朕)이 사람을 시켜 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공민왕
(恭愍王)이 죽은 뒤 그 아들이 있다고 칭하고 이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나, 나중에 와서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다. 또 왕요(王瑤)를 왕손(王孫)의 정파(正派)라 하여 세우기를 청하였다가 지금 또 제거해 버렸다. 두세 번 사람을 시켜 왔으나 대개는 자기 스스로 왕이 되기를 요구한 것이었다. 나는 다른 것을 묻지 않겠다. 자기 스스로 왕이 되어 스스로 하라. (그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서로 통하여 왕래하라.”
'공민왕' 관련자료
바로 이날 백관이 반열(班列)로 서서 하례하였다.
『태조실록』권2, 1년 11월 27일 갑진
황제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과 문연각 대조(文淵閣待詔) 단목예(端木禮)를 보내어 왕에게 고명(誥命)을 주었다. 근(謹)과 예(禮)가 절(節)을 가지고 이르니, 산붕(山棚)과 결채(結綵)를 베풀고, 나례(儺礼)·백희(百戲)를 갖추었다. 임금이 사모(紗帽)와 단령(團領) 차림으로 의장(儀仗)과 고취(鼓吹)를 갖추고 선의문(宣義門) 밖에 나가 영접하였다. 백관(百官)은 공복(公服)을 갖추고 따랐다. (장근과 단목예가) 안내를 받아 무일전(無逸殿)에 이르러 고명(誥命)을 선독(宣讀)하였다. 봉천(奉天) 승운(承運) 황제(皇帝)의 고(誥)에 이르기를,
“예전 철왕(哲王)이 정치를 하매, 덕(德)이 다하고 베푸는 것이 넓어서, 만방(萬方)을 덮어 기르니, 무릇 나라를 가진 자는 내외(內外)의 사이가 없이 신하로 복종[臣服]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군장(君長)을 세워 그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여, 이적(夷狄)과 중하(中夏)의 번병(藩屛)이 되게 하였다. 짐(朕)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예전의 성헌(成憲)을 본받으려 한다. 아아! 너 조선권지국사(朝鮮權知國事) 이(李) 【휘(諱).】 는 부형(父兄)의 전위(傳位)를 이어받아, 그 땅을 진수(鎭守)하여 편안하게 하고, 와서 직공(職貢)을 다하여 예(禮)를 따르기를 정성스럽게 하고, 봉(封)함을 받지 못하여 빌고 청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지극히 하므로, 이에 너를 명하여 조선 국왕(朝鮮國王)을 삼고, 금인(金印)을 주어, 동쪽 땅의 군장(君長)이 되게 한다. 아아! 하늘은 상심(常心)이 없어 오직 백성을 따르고, 백성은 항상 (왕으로) 추대하지 아니하고 오직 덕(德)이 있는 사람을 생각하나니, 너는 덕(德)을 힘써서 사랑하고 돕기를 이어받아, 집에서는 효우(孝友)하고, 윗사람에게는 충순(忠順)하며, 아랫사람에게는 어질고 은혜롭게 하여, 모든 백성이 복을 받고, 후손이 밝게 본받도록 하여, 길이 중국을 도우라. 땅을 열고 집을 세우는 것은 덕(德)이 아니면 마땅한 것이 없을지니, 공경하지 않으리오!”
임금이 고명을 받고 나서, 곤복과 면류관을 갖추고 사은례(謝恩禮)를 진행하였다. 사신(使臣)을 따라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절(節)을 대청(大廳)에 봉안하고, 절(節)에 배례(拜禮)하기를 망궐례(望闕禮)를 진행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면복(冕服)을 벗고 사례(私禮)를 진행하였다.
…(하략)…
『태종실록』권1, 1년 6월 12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