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친히 유서(諭書)
에게 내리기를, “내가 들으니, 중국은 관개(灌漑) 시설을 왕성하게 이용하는데, 흔히 수차(水車)1)
로써 성공을 거두는 예가 많다고 한다. 또 들으니, 왜(倭)에서도 또한 관개 시설을 이용하므로, 그 때문에 비록 조그마한 수재와 한재가 있어도 실농(失農)함이 적어서 백성의 식량이 항상 넉넉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전부터 하천의 제방에 물을 저장하는 곳이 많이 있었으나 이익을 줄 만한 곳이 많은 까닭에 만약 수재나 한재를 만나면 백성이 흩어져 유망(流亡)한다. 선왕(先王)
27년(1445)]부터였다. 이 같은 부류가 하나가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말과 같다면 이 같은 일들은 모두 오늘날에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경기에 시험하였으나 이익이 없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대개 또한 사람의 한 일이 미진한 것이지 어찌 하천 제방의 죄이겠는가? 무릇 수리를 다스리는 것은 옛날부터 어렵게 여겼다. 요(堯)임금 때에 곤(鯀)2)
이 공적을 쌓았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징계하고, 다시 대우(大禹)
28)·정묘년(1447, 세종
29) 간에 평안도와 황해도에 기근이 더욱 심하였던 것은 수전을 만든 곳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금년에도 두 도는 또한 실농(失農)하는 데 이르렀으나 수전을 만든 곳은 아주 심한 데에 이르지는 아니하였다. 이것이 내가 관개에 급급하고 수전을 만들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너그럽고 소탈한 선비 한두 사람을 택하여 수리의 책임을 오로지 위임하려고 하는 것이다. 봄·가을로 순찰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農桑]을 권장하고, 정성으로 수전의 이익을 가르치고 타이르며 백성들의 진정한 바람에 따라 혹은 하천을 막기도 하고, 혹은 못을 파기도 하여 혹은 진펄[沮洳]에 샘이 있는 땅을 개간하게 하라. 이와 같으면 새로 개간한 첫해에는 비록 결실이 무성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수년 뒤에는 이익을 얻는 것이 자연히 배나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백성들이 만약 떨쳐 일어나서 새로운 수전을 많이 개간할 때 첫해와 2년에는 그 세(稅)를 전부 면하고, 3년째와 4년째에는 그 조세를 반납(半納)하게 하고, 5년째 뒤에는 그 전량의 조세를 거두면 대체로 또한 백성을 구제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내가 이 뜻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도의 감사
에게 유지를 내려서 수전을 권장하여 만들게 하면 됩니다’ 하나, 내가 다시 이를 생각해 보니, 과연 대신들의 의논과 같이 바야흐로 민간에 일이 많고, 또 사람을 보내어 새 일을 일으킨다면 고식적(姑息的)인 백성들은 훗날 이익을 헤아리지 못하고 시끄럽게 수심과 원망을 하게 될 것이므로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니, 그 도(道)에는 진펄의 땅이 많지만 수전 만드는 일을 백성들이 기꺼이 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니, 경은 이 뜻을 알고, 나의 뜻을 가지고 두루 촌민들을 깨우쳐 주고, 인도하기를 이익으로서 한다면 그 중에 이러한 뜻을 아는 백성이 있어서 반드시 서로 이끌고 이에 응할 자가 있을 것이다. 경은 찾아서 묻고 그들과 논의하여 수전을 많이 만들되, 혹은 샘이 있는 곳에 의거하고, 혹은 하천과 못을 막아서 민력(民力)에 해롭게 하지 말고 백성의 원망을 일으키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견고해 질 것이요, 그 수세(水勢)로 하여금 스밀 것은 스미게 하고, 저수(貯水)할 것은 저수하게 하여, 모름지기 타인으로 하여금 간언(間言)
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렸던 명령서
를 지어 황해도·평안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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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차(水車) : 물을 대는 기구의 하나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관개(灌漑)에 이를 써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실패하였다.
세종을 말함
께서 이를 염려하여 수차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본국(本國)은 토양의 성분이 푸석하여 물을 받을 수 없는 까닭에 수차법은 마침내 이로움을 보지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를 생각하여 보니, 천지 사이에는 생기가 유행하여, 비는 적시어 주고 해는 말리어 주는 것이 자상하고 은근하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크지만 반드시 유감이 있어서 혹은 큰물을 내기도 하고 혹은 가뭄을 일으키기도 하여 사람의 행위만 못하다. 그러므로 하늘은 반드시 사람에게 손을 벌리어서 사람이 능히 재량하여 만들고 도와준 뒤에야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극진히 하고서 하늘에 기대하면 천은(天恩)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왕이 수차법에 유의하시던 뜻을 생각하고 또 금년(: 문종 1년(1451))에는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밤낮으로 백성을 구제하려는 뜻을 계승할 방법을 생각하니, 하천의 제방과 관개와 같이 급한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우리나라는 개벽한 이래 나라를 세운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약 관개할 만한 곳이 있었으면 옛날 사람들이 이미 다하여 지금은 반드시 새로 이용할 곳이 없을 것이다. 또 일찍이 이미 경기에 제방한 곳을 시험하였으나 모두 물 때문에 무너져서 단지 백성의 노력만을 허비하고 결국 이로운 바는 없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옛사람들이 모두 다 이미 하였다고 생각하며 생각을 두지 않는다면, 즉 면화(綿花) 같은 것도 우리나라에서 심은 것이 이제 오래되지 아니하고, 화약이 그 이용을 자세하고 극진하게 한 것은 을축년[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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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곤(鯀) : 우(禹)의 아버지로 요(堯)·순(舜) 때 9년이나 황하를 다스렸다.
하나라의 시조 우임금
를 임용하지 않았다면 천하의 중민(衆民)이 어찌 쌀밥을 먹는 공이 있었겠느냐? 지금은 다만 인력의 다소와 물[水]을 쓸 만한지의 여부를 논하여 그 경중(輕重)과 이해(利害)를 살필 뿐이요, 그 방축(防築)이 견고한지의 여부는 사람이 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개 동에서도 할 수 있고 서에서도 할 수 있으며, 별로 커다란 폐단이 없는 일이라면 마땅히 옛날의 관례대로 하고 고쳐 만들 필요는 없으나 농사일은 늦출 수가 없다. 하삼도(下三道) 같은 곳은 본래 수전이 많고 민간의 습속도 농사에 힘쓰니 이제 고치어 확장하지 않더라도 또한 가(可)하다고 하겠으나, 평안도·황해도는 근년에 계속하여 흉년이 들어서 태반이 유망하니, 만약에 구제할 만한 일만 있다면 마땅히 서둘러서 하여야 할 일이지 어찌 늦출 수가 있겠는가? 대체로 모든 농사는 물이 나면 한전(旱田)이 상하고 가물면 수전이 상하는데, 수재(水災)의 피해는 구할 도리가 없지만, 한재(旱災)의 피해는 하천을 제방하고 물을 저장하여서 구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병인년(1446,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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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간하는 말
이 없게 하라. 어떤 사람은 또 말하기를, ‘평안도의 하천은 모두 험하고 커서 막을 수 없다’ 하니, 경은 이 뜻을 아울러 살펴서 마음을 다하여 적당히 배치하고, 행할 만한지의 여부와 민정이 원하고 싫어하는지를 추후에 자세하게 계달(啓達)하라” 하였다. 『문종실록』권10, 1년 11월 18일 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