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백(奉化伯) 정도전
(鄭道傳),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를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참형을 당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정안군(靖安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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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
의 건국 공로는 여러 왕자 중에 견줄 만한 이가 없기 때문에 특별히 대대로 전해 온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00여 호를 내려 주었다. 그 후에 여러 왕자와 공신들을 각 도의 절제사로 삼아 시위(侍衛)하는 병마(兵馬)를 나누어 맡게 하니, 정안군은 전라도를 맡게 되고,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은 동북면을 맡게 되었다. 이에 정안군이 가별치를 방번에게 양보하니, 방번은 이를 받고 사양하지 않았는데, 임금도 이를 알고 또한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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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과 남은 등은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어린 얼자(孼子)를 꼭 세자로 세우려고 하여서 심효생에게 외롭고 한미(寒微)하면 제어하기 쉽다고 이야기하고는 그 딸을 아내로서의 덕[婦德]이 있다고 칭찬하며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빈(嬪)으로 삼길 청하였다. 그리고 세자의 동모형(同母兄)인 방번과 자부(姉夫)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과 같이 모의하여 당여(黨與)를 많이 만들고, 장차 여러 왕자를 제거하고자 몰래 환자(宦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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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김사행(金師幸)을 사주하여 중국의 여러 황자(皇子)를 왕으로 봉한 예에 따라 여러 왕자를 각 도에 나누어 보내기를 비밀히 계청(啓請)
임금께 아뢰어 청함
하게 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중략)…
정안군이 ‘산성(山城)’이란 두 글자를 명하고,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이르러 천명(天命)을 기다리었다.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병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군사를 시켜 예빈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에게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병의 많고 적음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光化門)으로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정예(精銳)한 기병(騎兵)이 가득하다고 전하였다.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출병하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神)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정안군이 또 이숙번(李叔蕃)을 불러 말하기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간당(姦黨)이 모인 장소에 이르러 군사로 포위하고 불을 질러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불시에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밤 이경(二更, 밤 9~11시)에 송현(松峴)을 지나다가 이숙번이 말을 달려 고하기를, "여기가 소동(小洞)이니 곧 남은 첩의 집입니다." 하였다. 정안군이 말을 멈추고 먼저 보졸(步卒) 소근(小斤) 등 10인으로 하여금 그 집을 포위하게 하니, 안장 갖춘 말 몇 필이 그 문밖에 있고, 노복(奴僕)은 모두 잠들었는데, 정도전
과 남은 등은 등불을 밝히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근 등이 지게문을 엿보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화살 세 개가 잇달아 지붕 기와에 떨어져서 소리가 났다. 소근 등이 다시 동구(洞口)로 나와서 화살이 어디서 왔는가를 물으니, 이숙번이 말하기를, "내가 쏜 화살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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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근 등으로 하여금 다시 들어가 그 집을 포위하고 그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하니, 정도전
등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으나, 심효생·이근(李懃)·장지화 등은 모두 살해되었다. 정도전
이 도망하여 그 이웃의 전 판사(判事) 민부(閔富)의 집으로 들어가니, 민부가 아뢰기를,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정안군은 그 사람이 정도전
인 줄을 알고 소근 등 4인을 시켜 잡게 하였다. 정도전
이 침실(寢室) 안에 숨어 있었기에 소근 등이 소리쳐 밖으로 나오게 하니, 정도전
이 짧은 칼을 가졌지만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소리쳐 칼을 버리게 하니, 정도전
이 칼을 던지고 문밖에 나와서 말하기를, "청하건대 죽이지 마라. 한마디 말하고 죽겠다." 하였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의 말 앞으로 가니, 정도전
이 말하기를,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 또한 살려 주소서." 하였다. 예전이란 임신년(1392, 태조
1)을 가리킨 것이다. 정안군이 말하기를,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겼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하고, 목을 베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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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정안군의 부인이 스스로 정안군이 서 있는 곳까지 가서 그와 화패(禍敗)를 같이하고자 걸어 나오니, 정안군 휘하의 군사 최광대(崔廣大) 등이 극력으로 간(諫)하며 말리는 사이에, 종 김부개(金夫介)가 정도전
의 갓과 칼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부인이 그제야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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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은 아들 네 명이 있었는데,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위급함에 구원하러 가다가 유병(遊兵)에게 살해되고, 정담(鄭湛)은 집에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처음에 정담이 아버지에게 고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정안군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정도전
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고려(高麗)를 배반했는데 지금 또 이편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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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이에 정안군이 도당(都堂)
등이 세자를 감싸고서 여러 왕자를 해치고자 하니 화(禍)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천지와 종사
(宗社)의 신령에 힘입어 난신(亂臣)이 참형을 당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적장자(嫡長子)인 영안군
(永安君)을 세워 세자로 삼으십시오.” 하였다.
도평의사사
으로 하여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 “적통(嫡統)을 장자(長子)로 세우는 것이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인데, 전하께서 장자를 버리고 어린 아들을 세웠으며,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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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疏)가 올라와서 이문화(李文和)가 읽기를 마치었는데, 세자도 임금의 곁에 있었다. 임금이 한참 만에 말하기를, “모두 내 아들이니 어찌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하고, 방석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에게는 편리하게 되었다” 하고는, 즉시 윤허를 내리었다. 대궐 안에 있던 여러 재상이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이문화가 대답하기를, “세자를 바꾸는 일입니다” 하였다.
노석주(盧石柱)가 교서(敎書)의 초본(草本)을 봉하여 이문화로 하여금 서명(署名)하게 하니 이문화가 받지 않았고, 다음에 이화(李和)에게 청하였으나 또한 받지 않았고, 다음으로 자리에 있던 여러 재상에게 청하였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이에 이문화가 말하기를, “그대가 지은 글에 어찌 자기가 서명하지 않는가?” 하니, 노석주가 알겠다고 하고 곧바로 서명하여 소매 속에 넣었다.
조금 후에 노석주가 내전(內殿)에 들어가 명령을 받아 나오면서 말하기를, “교서를 고쳐 써서 빨리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이문화가 말하기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하니, 노석주가 말하기를, “개국공신 정도전
과 남은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왕자와 종실(宗室)들을 해치려고 꾀하다가, 지금 이미 그 계획이 누설되어 공(功)이 죄를 가릴 수가 없으므로, 이미 모두 살육(殺戮)되었으니, 그 협박에 따라 함께 행동한 무리는 죄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 하니, 변중량(卞仲良)으로 하여금 이를 써서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시녀(侍女)에게 부축받아 일어나 압서(押署)하기를 마치고 돌아누웠는데 병이 심하여 토하고자 하였으나 토하지 못하며 말하기를,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한데 내려가지 않는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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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군이 군기직장(軍器直長) 김겸(金謙)을 시켜 무기고를 열고 갑옷과 창을 내어 화통군(火㷁軍) 100여 명에게 주니, 군대의 형세가 조금 떨치었다. 갑사(甲士) 신용봉(申龍鳳)이 대궐에 들어가서 정안군의 말을 전하기를, “흥안군과 무안군은 각기 사제(私第)로 돌아갔는데, 의안군 이하의 왕자는 어찌 나오지 않는가?” 하였다. 여러 왕자가 서로 눈짓하면서 말하지 아니하므로 다시 독촉하니, 이화 이하의 왕자들은 모두 나왔고, 심종(沈悰)은 궁의 수문(水門)을 거쳐 도망쳐 나가고, 정신의(鄭臣義)만이 미적거리며 머무르므로 이를 재촉하니 그제야 나왔다.
도당에서 방석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윤허했으니 나가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방석이 울면서 하직하니, 현빈(賢嬪)이 옷자락을 당기면서 통곡하므로 방석이 옷을 떨치고서 나왔다. 처음에 방석을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기로 의논했는데, 방석이 궁성의 서문을 나가자 이거이(李居易)·이백경(李伯卿)·조박(趙璞) 등이 도당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길에서 죽였다.
도당에서 또 방번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방번에게 이르기를, “세자는 죽었지만, 너는 먼 지방에 안치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하였다. 방번이 장차 궁성의 남문을 나가려 하는데, 정안군이 말에서 내려 문안으로 들어와 손을 이끌면서 말하기를, “남은 등이 처음에 우리 무리를 제거하게 된다면 너도 또한 마침내 화를 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너를 부른 것인데, 너는 어찌 따르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외방에 나가더라도 얼마 안 되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잘 가거라. 잘 가거라” 하였다. 장차 통진(通津)에 안치하려고 하였기에 양화도(楊花渡)
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지역의 한강 북안에 있었던 나루터
를 건너 도승관(渡丞館)에서 유숙하였는데, 이방간(李芳幹)이 이백경(李伯卿) 등과 더불어 또 도당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방번을 죽였다. 『태조실록』권14, 7년 8월 26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