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萬曆) 20년(1592) 6월 전라도 의병장 절충장군 행 의흥위 부호군 지제교 고경명(高敬命)이 삼가 각 도 지방관과 사민(士民), 군인(軍人) 등에게 급히 알린다. 근래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島夷]가 불시에 침입하였다. 처음에는 역량(逆亮)1)
이 맹약을 저버린 것을 본받더니, 마침내는 구오(勾吳)의 천식(荐食)2)
을 자행하여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 틈을 타서 허점을 찌르고 길이 몰아치며 하늘도 기만할 수 있다 하고 마구 쳐들어왔다.
1)
역량(逆亮) : 금나라 제 4대 황제였던 완안량(完顔亮, 1122~1161, 재위 1149~1161)을 말한다. 1149년 사촌형제인 금 희종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역적이라는 뜻의 역량(逆亮)으로 불렸다. 1161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40만 군사로 남송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채석(采石)에서 우윤문(虞允文)이 지휘하는 송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사이 거란이 서북 변경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종제인 완안옹(完顔雍)이 동경 요양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금 세종(世宗)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남송 공략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군사들에게 장강을 건너 진군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이에 휘하의 대장 야율원의(耶律元宜)에게 자신의 막사에서 기습당하여 죽었다. 사후 해릉왕(海陵王)으로 강등되었다.
2)
구오(勾吳)의 천식(荐食) : 천식(荐食)은 다른 나라를 점차 먹어들어간다는 뜻으로, 변방의 제후국이었던 오(吳)나라가 패자로 부상하여 다른 나라를 공략한 일을 말한다. 구오는 춘추전국시대 오나라(?~기원전 473)의 별칭이자, 초대 왕인 태백(太伯)의 다른 이름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조부인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위를 막내아들 계력(季歷)에게 물려주었으며 계력 사후 그 아들인 희창(姬昌)이 왕위에 올라 문왕이 되었다. 맏아들인 태백은 둘째 중옹(仲雍)과 함께 멀리 떠나 정착한 곳에서 왕위에 올라 구오라고 하였다. 주나라 건국 후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은 중옹의 증손이자 오나라의 군주인 주장(周章)을 찾아내어 제후로 봉하였다. 오나라는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다른 국가와 문물 교류가 별로 없다가 19대 군주 수몽(壽夢, 기원전 585~561)에 이르러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진(晉)나라가 초(楚)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오나라에 병법을 가르치는 등 군사 원조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오나라는 중원 각국과 교류하기 시작하며 국력이 신장되어 갔다. 오나라는 24대 오왕 합려(闔閭) 때 제(齊)나라의 병법가인 손무(孫武)를 초빙하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초나라와 다섯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할 정도로 강국이 되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중국 전역을 제패하려는 야심을 갖고 주 왕실을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주재하였댜. 이 자리에서 주 왕족인 희성(姬姓)의 제후들 중 누가 맹주가 될 것인지 진(晉)나라 정공(定公)과 다투었으나 정공의 신하인 조앙(趙鞅)의 위협에 굴복하여 맹주의 자리를 포기하였다가, 무력을 써서 진나라 정공의 진영을 포위하고 맹주가 된 후 귀국하였다. 그러나 부차가 회맹을 주도하는 동안 오나라는 월(越)나라 군에게 기습당하였으며, 4년 뒤 오나라는 다시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우리 장수들은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고 수령이라는 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서 저 왜적 놈들에게 임금과 부모를 내맡겼으니 이 어찌 차마 할 노릇이며, 우리 지존에게 사직
을 근심하게 하였으니 그대들 마음은 평안한가? 100년 동안 휴양한 생민들 가운데 어찌하여 일찍이 한 사람도 의기의 남아가 없다는 말인가.
'사직' 관련자료
고립된 소수의 군사로 깊이 쳐들어간 것3)
은 여진
(女眞)이 본시 병법을 몰랐기 때문이며 중항열(中行說)
과 지금의 상황이 불행히도 비슷하다.
3)
고립된 소수의 군사로 깊숙히 쳐들어 간 것 :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송나라를 쳐들어간 일을 말한다.
'여진' 관련자료
한나라의 환자(宦者, 환관)로 흉노에 항복하여 한을 괴롭혔던 인물
을 볼기치지 못한 것은 한나라가 계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강(長江)이 갑자기 천혜의 요새로서 힘을 잃어버려서 오랑캐의 군사가 이미 수도까지 침입하니 남조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을 듣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통탄할 일이었다. 북군이 날아왔다는 말4)
4)
북군이 날아왔다는 말 : 남북조 시기 북쪽의 수나라 군대가 순식간에 장강을 건너 남쪽의 진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진나라에서는 북쪽의 군대가 강을 날아서 건넜다고 탄식하였다.
드디어 우리 성상께서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는5)
마음으로 명황(明皇)
이는 종사
를 위한 치밀한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잠깐 지방을 순시하는 수고를 꺼리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지만 공락(鞏洛)
은 애통함을 또 성조에서 내리기 위함이다. 무릇 혈기와 생명이 있는 자는 누구인들 분해서 죽고자 하지 않겠는가.
5)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는 : 주(周) 문왕(文王)의 조부인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빈(邠) 땅을 떠나 기산(岐山)으로 옮겨 주나라를 건립한 일을 말한다.
당나라 현종의 시호
이 서촉(西蜀)에 행차하던 거조를 하셨으니, 6)
6)
명황(明皇)이 서촉(西蜀)에 행차하던 거조를 하셨으니 : 당나라 현종이 안사의 난을 피해 서촉 땅으로 파천한 사실을 말한다.
'종사' 관련자료
공현(鞏縣)과 낙읍(洛邑)
의 자욱한 먼지에 옥안은 깊은 근심을 나타냈고, 아민(峩岷)
서촉 땅의 아미산(峨眉山)과 민산(岷山)
의 위잔(危棧)
절벽 사이를 나무조각으로 이어 만든 험난한 길
에 취화(翠華)
천자의 수레 앞에 세우기는 깃발
는 먼 길을 달려야 했다. 하늘이 이성(李晟)
당 덕종의 무장으로, 783년 일어난 주차(朱泚)의 반란을 평정함
을 낸 것은 적을 숙청하는 일은 그에게 맡기기 위해서이고, 육지(陸贄)
당 덕종의 신하로 한림학사를 지냄
가 조서를 쓴 것7)
7)
육지(陸贄)가 조서를 쓴 것 : 783년 수도 장안을 점령한 주차(朱泚)의 반란군을 피하여 당나라 덕종은 봉천(奉天)으로 피신하였다. 육지는 그를 따라가서 조서(詔書)를 지었는데 그 문장이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어찌하여 사람의 꾀가 어긋나 나라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봉천(奉天)의 어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다.8)
저 벌과 전갈[蜂蠆]처럼 어리석은 왜놈들이 아직도 경예(鯨鯢)
8)
봉천(奉天)의 어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다 : 정강(靖康)의 변(變)을 말한다. 북송 말년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입하여 수도 개봉에 접근하자, 흠종 황제는 강화파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의를 하기로 하였다. 그는 수도를 지키기 위해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각지의 송나라 군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고, 동생인 강왕(康王) 조구(趙構)를 강화 사절로 보냈다. 조구는 중도에 생각을 바꾸어 금나라 진영으로 향하지 않고 상주(相州)로 가서 군사를 모았으나, 금나라 군사들은 그 사이 빠른 속도로 개봉에 도착하여 1126년 11월 금군(禁軍) 3만 명밖에 남지 않았던 도성을 쉽게 점령하고 황제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궁궐, 사찰의 재물과 송나라의 주군현 지도를 약탈하였으며, 태상황 휘종, 흠종 황제를 비롯한 황족과 관리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고래의 수컷과 암컷. 약소국을 병탄하는 악한 무리에 비유됨
의 죽음을 면하고 있다. 성안에서 생명을 간신히 부지하고 있으니 장막에 집을 짓고 날아다니는 제비와 무엇이 다르겠으며 서울을 점령하고 있으니 마치 우리 안에서 뛰어다니는 원숭이와 같다. 비록 명군[天兵]이 소탕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흉적의 무리가 빠져 달아나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 고경명
은 진실된 마음의 노인이며 백발 부유(腐儒)
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는 도다.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 울리듯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가 구름처럼 모이고 비처럼 모이니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함께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위급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처음부터 의병
이라 칭한 이상 직분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서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 대소인원의 모의를 하지 않고도 뜻이 같았으며 멀고 가까운 곳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였다.
'고경명' 관련자료
쓸모없는 선비라는 뜻으로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로서,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없어 중류의 노를 쳐서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는 한갓 견마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품었을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미약한 힘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의병
'의병' 관련자료
'의병' 관련자료
아! 우리 열읍 수령, 각 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주고 혹은 군량을 돕고,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임금을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우리 행궁(行宮)
큰 근심은 앞길을 열어 주는 것이니 노래하며 더욱 한나라를 생각하는 도다. 호걸들이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이니 나라를 위한 눈물(新亭之對泣)을 지을10)
까닭이 없고, 노인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서울로 돌아오시는 날을 보리라. 의당 기운을 내서 남보다 먼저 출정함이 마땅하니, 이에 먹은 마음을 터놓고 충심으로 고하는 바이다.
왕의 임시 거처
은 멀리 서도(西道, 평안도)에 있지만 조정의 계획이 장차 정해질 것이다. 왕업이 어찌 한구석에 주저앉겠는가. 옳은 도리로 패하는 자는 멸망하지 않는 것이니 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나라의 방위에 이르렀고, 9)
9)
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나라의 방위에 이르렀고 : 고대 점성술에서는 복을 주관하는 별인 복덕성이 있는 나라를 침범하면 침범한 나라가 오히려 망한다고 믿었다.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오(吳)나라를 침범하였다가 몇 해 뒤 진나라는 멸망하고, 오나라는 후한 멸망 후 삼국의 하나로서 부활한 사실을 말한다.
10)
우국충정의 비분강개하는 심정을 표현하는 말로서, 동진(東晉)이 망할 때 명사들이 모여 국가의 불운을 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제봉집』 유집, 격문, 격제도서
- 역량(逆亮) : 금나라 제 4대 황제였던 완안량(完顔亮, 1122~1161, 재위 1149~1161)을 말한다. 1149년 사촌형제인 금 희종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역적이라는 뜻의 역량(逆亮)으로 불렸다. 1161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40만 군사로 남송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채석(采石)에서 우윤문(虞允文)이 지휘하는 송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사이 거란이 서북 변경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종제인 완안옹(完顔雍)이 동경 요양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금 세종(世宗)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남송 공략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군사들에게 장강을 건너 진군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이에 휘하의 대장 야율원의(耶律元宜)에게 자신의 막사에서 기습당하여 죽었다. 사후 해릉왕(海陵王)으로 강등되었다.
- 구오(勾吳)의 천식(荐食) : 천식(荐食)은 다른 나라를 점차 먹어들어간다는 뜻으로, 변방의 제후국이었던 오(吳)나라가 패자로 부상하여 다른 나라를 공략한 일을 말한다. 구오는 춘추전국시대 오나라(?~기원전 473)의 별칭이자, 초대 왕인 태백(太伯)의 다른 이름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조부인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위를 막내아들 계력(季歷)에게 물려주었으며 계력 사후 그 아들인 희창(姬昌)이 왕위에 올라 문왕이 되었다. 맏아들인 태백은 둘째 중옹(仲雍)과 함께 멀리 떠나 정착한 곳에서 왕위에 올라 구오라고 하였다. 주나라 건국 후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은 중옹의 증손이자 오나라의 군주인 주장(周章)을 찾아내어 제후로 봉하였다. 오나라는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다른 국가와 문물 교류가 별로 없다가 19대 군주 수몽(壽夢, 기원전 585~561)에 이르러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진(晉)나라가 초(楚)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오나라에 병법을 가르치는 등 군사 원조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오나라는 중원 각국과 교류하기 시작하며 국력이 신장되어 갔다. 오나라는 24대 오왕 합려(闔閭) 때 제(齊)나라의 병법가인 손무(孫武)를 초빙하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초나라와 다섯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할 정도로 강국이 되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중국 전역을 제패하려는 야심을 갖고 주 왕실을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주재하였댜. 이 자리에서 주 왕족인 희성(姬姓)의 제후들 중 누가 맹주가 될 것인지 진(晉)나라 정공(定公)과 다투었으나 정공의 신하인 조앙(趙鞅)의 위협에 굴복하여 맹주의 자리를 포기하였다가, 무력을 써서 진나라 정공의 진영을 포위하고 맹주가 된 후 귀국하였다. 그러나 부차가 회맹을 주도하는 동안 오나라는 월(越)나라 군에게 기습당하였으며, 4년 뒤 오나라는 다시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 고립된 소수의 군사로 깊숙히 쳐들어 간 것 :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송나라를 쳐들어간 일을 말한다.
- 북군이 날아왔다는 말 : 남북조 시기 북쪽의 수나라 군대가 순식간에 장강을 건너 남쪽의 진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진나라에서는 북쪽의 군대가 강을 날아서 건넜다고 탄식하였다.
-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는 : 주(周) 문왕(文王)의 조부인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빈(邠) 땅을 떠나 기산(岐山)으로 옮겨 주나라를 건립한 일을 말한다.
- 명황(明皇)이 서촉(西蜀)에 행차하던 거조를 하셨으니 : 당나라 현종이 안사의 난을 피해 서촉 땅으로 파천한 사실을 말한다.
- 육지(陸贄)가 조서를 쓴 것 : 783년 수도 장안을 점령한 주차(朱泚)의 반란군을 피하여 당나라 덕종은 봉천(奉天)으로 피신하였다. 육지는 그를 따라가서 조서(詔書)를 지었는데 그 문장이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 봉천(奉天)의 어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다 : 정강(靖康)의 변(變)을 말한다. 북송 말년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입하여 수도 개봉에 접근하자, 흠종 황제는 강화파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의를 하기로 하였다. 그는 수도를 지키기 위해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각지의 송나라 군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고, 동생인 강왕(康王) 조구(趙構)를 강화 사절로 보냈다. 조구는 중도에 생각을 바꾸어 금나라 진영으로 향하지 않고 상주(相州)로 가서 군사를 모았으나, 금나라 군사들은 그 사이 빠른 속도로 개봉에 도착하여 1126년 11월 금군(禁軍) 3만 명밖에 남지 않았던 도성을 쉽게 점령하고 황제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궁궐, 사찰의 재물과 송나라의 주군현 지도를 약탈하였으며, 태상황 휘종, 흠종 황제를 비롯한 황족과 관리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 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나라의 방위에 이르렀고 : 고대 점성술에서는 복을 주관하는 별인 복덕성이 있는 나라를 침범하면 침범한 나라가 오히려 망한다고 믿었다.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오(吳)나라를 침범하였다가 몇 해 뒤 진나라는 멸망하고, 오나라는 후한 멸망 후 삼국의 하나로서 부활한 사실을 말한다.
- 우국충정의 비분강개하는 심정을 표현하는 말로서, 동진(東晉)이 망할 때 명사들이 모여 국가의 불운을 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